빈섬, 취한 말들이 시간을 건너가는 풍경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요즘 와서는 약간 옛말처럼 느껴지는, '베풀다'라는 말이 있다. 남에게 돈이나 음식같은 물건을 주거나 일을 도와주어서 혜택을 입게 한다는 의미이다. 쉽게 보면 '주다'라는 말과 비슷하게 쓰이다. 친절, 은혜, 사랑, 은덕, 공덕, 도움, 자비, 아량을 베푸는 것은, 그런 미덕을 누군가에게 전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베풀다'에는 상하관계가 있다. 위에서 아래로 주는 것이다. 위와 아래의 '차이'가 현격하여, 위에선 조금 주어도 아래에서 크게 받는 것이 '베풀다'란 말 속에 숨어있다. 위는 재물과 권력과 복락을 갖추고 있으며, 아래는 그것이 몹시 부족한 상태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친절이나 사랑, 혹은 도움을 베푸는 것은 반드시 상하관계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다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도움을 받으면 좋을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베풀다'라는 말은 15세기 문헌(분류두공부시언해, 1481)에도 보인다. 조선초에는 '베프다' '베플다'로 쓰였다. 이 말이 '베'란 말과 '프다/플다/풀다'가 합쳐진 말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베를 푼다'는 말이 하나의 낱말로 굳어진 듯 하다. 이 말을 의역(意譯)하면 보시(布施)가 된다. 보시는 불교 용어로, 자비의 마음으로 널리 베푸는 것을 뜻하는데, 그 한자를 들여다보면 포(布,'베'라는 뜻, 보로 읽는다)를 베푼다(施)는 의미이다.베를 푸는 것이 무슨 뜻일까. 베는 일반적으로 직조물인 천을 모두 가리키기도 하지만, 원래 뜻은 삼으로 짠 천, 즉 대마포를 가리켰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직조산업이 발전하여, 삼과 모시와 비단으로 옷을 해 입었다. 삼은 거칠지만 시원하고 모시는 부드럽고 정결하다. 비단은 더욱 부드럽고 화려한 기운이 있다. 삼베옷은 대개 거친 삶에 걸쳐진 의상이고, 모시와 비단은 귀한 신분에게 걸쳐진 옷이다.의식주 중에서 산중 시골의 가난한 자가 제 스스로 하기 어려운 것이 '의(衣)'다. 먹고 자는 것이야 대강 구할 수 있지만, 옷은 베틀이 있어야 짤 수 있고, 만만찮은 수공이 들어가는 일이다.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옷이었다. 가난한 이를 표현할 때, '헐벗고 굶주린'이란 말을 쓰는데, 굶주림보다 앞서 나오는 것이 '헐벗고'인 것을 주목해보라. 옷을 입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치명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부자나 권력층이 곳간에 감아 쌓아둔 천을 꺼내, 가난한 자나 공이 있는 자에게 하사하는 일이 '베를 풀어주는 일'이다. 왕실에선 군주가 친견한 사람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데, 음식이나 벼슬이나 식읍(토지나 영토) 도 있었지만, 비단을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 5살 김시습에게 50필의 비단을 내린 세종대왕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 천재소년은 무거운 비단을 들지않고 끝을 풀어 자락을 끌고 나가는 비범함을 보여 역사에 남는다. 이 소년은 베푼다는 것이 이처럼 고루 멀리 퍼져나가야 한다는 점을 말없는 퍼포먼스로 보여준 것일까.보시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베풀다'라는 말은 불교와 친밀해보인다. 이 종교에서 널리 베푸는 일은, 그들의 수행을 아우르는 요점이기도 하다. 베푸는 일을 제하면 무슨 불교가 있겠는가. 중생을 구제하고 이타를 실천하는 것 이외에 무슨 수행이 있겠는가. 자신만을 생각하고 제 가족, 제 핏줄, 제 무리만을 생각하는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아무런 관련이 없는 타인에게도 똑같이 모든 것을 베풀 수 있는 태도를 귀하게 여긴 것이 '보시'라는 개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종교적 개념조차도 세속의 탐욕이 제 편의대로 윤색하여, 남을 돕는 일이 저와 제 가족과 제 죽은 뒤의 공덕을 쌓는 방편인양 호도되었다. 그런 세태에 혀를 차면서도, 그런 욕망인들 어떠랴? 아무런 베품도 없는 삶보다는 백내 낫지 않느냐는 현실론이 등장하기도 한다.'베푼다'는 말이 낯설어져가고 있는 까닭은, 베푸는 행위가 희귀해져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급히 베풀어야할 '삶의 궁핍'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물질의 풍요가 모든 궁핍을 다 해결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욱 사무치는 정신적 궁핍을 낳은 점이 있다.베를 푸는 일은, 원래 마음을 푸는 일이었다. 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베를 아낌없이 풀 수 있고 제것을 기꺼이 내줄 수 있다. 천만금을 쌓아놓아도 풀 마음이 1인치도 없으면 베는 그저 제 탐욕의 창고를 채우고 있는 물건일 뿐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내어 풀어주는 일이 예전보다 더 절실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뭐가 중한겨?라는 질문에 우리 모두가 움찔한 것은 저 '보시'가 사라진 마음의 옹졸한 우선순위들에 대해 불심검문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던가? 타인이 살아야 나도 산다는 것이 공생이다. 내가 살아야 타인도 산다는 말의 어순만 바꿔도, 비좁아터진 생각이 조금은 넓어지지 않겠는가, 나여.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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