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탈곡기 부장도 사고뭉치 수습기자도...마음 들여다보니 異口同聲

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의 정재영과 박보영

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스틸 컷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는 사회 초년생이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살아남으려고 분투하는 모습을 다룬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에 현실감 넘치는 대사와 유머를 삽입한 코미디다. 수습사원과 상사의 갈등은 스케치에 그치고, 극 전체를 이끄는 사건이 없어 시트콤을 여러 편 묶은 듯 가볍다. 스포츠신문 수습기자 도라희를 연기한 박보영(25)과 연예부장 하재관을 연기한 정재영(45)을 만났다. ◆박보영 "스스로 우러나와야 진짜 열정"박보영은 직장생활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막 취업한 친구들의 고된 하루를 들여다보며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열정이라는 단어를 좋게 받아들이는 친구는 거의 없을 걸요. 의미가 많이 퇴색했잖아요. 제 친구들만 해도 회사에 인질처럼 잡혀 일하는 것 같아요."아이로니컬하게도 그녀는 끊임없이 열정을 쫓는다. 프리랜서나 다름없는 배우로 일하면서 스스로 열정을 찾는 습관이 생겼다고. 박보영은 그 열매가 더 달콤하다고 믿는다. "열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연기만 해도 그래요. 누가 시킬 때보다 스스로 부족한 점을 인지하고 노력해서 표현할 때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스틸 컷

박보영은 2008년 '과속스캔들'이 관객 824만5523명을 동원하면서 깜짝 스타가 됐으나 전속계약해지를 둘러싼 소속사와의 분쟁에 휘말려 3년(2009~2011년)을 쉬었다. "다른 일을 시작해도 늦지 않을 나이여서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모든 걸 정리하고 시골(충북 증평)로 내려갈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연기 외에 잘할 수 있을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응원을 보내주셔서 다시 희망을 키울 수 있었어요."다시 끌어올린 열정의 힘은 놀랍다. 올해에만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돌연변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등 영화 세 편에 출연했다. tvN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에서 빙의녀 나봉선을 귀엽게 그려내 광고 제의도 끊이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그런 그녀가 어떤 역할을 맡아도 '여동생' 같은 이미지에서 탈피하지 못한다고 우려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던 박보영은 "그래서 '오 나의 귀신님'에 출연했다"고 했다. "그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여전히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나 봐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서인지 궁금증보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보란 듯이 귀여운 연기를 해보겠다는 생각에 나봉선을 선택했죠."

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스틸 컷

이런 털털한 성격은 육군 특수전 주임 장비 정비대대에서만 34년 동안 복무한 아버지 박완수(55) 원사의 교육 덕이다. "어렸을 때 정신교육을 자주 받았어요. 혼도 많이 났고요. 회초리를 맞은 적도 있죠. 되돌아보면 그때 얻은 교훈들이 배우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고 있어요. 어려운 일이 닥쳐도 훌훌 털어버리거든요." 지난 6월 전역한 아버지는 그런 딸의 열렬한 팬이다. ◆정재영 "열정 강요하는 상사도 아프다""보영이가 기성세대로 볼 것 같아서 신경 쓰이네." 정재영은 연신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하재관을 옹호했다. "세상에 절대 악이 어디 있겠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소신을 잃는 현실이 슬픈 것이지요." 그가 생각하는 열정은 사랑과 맥락이 닿는다. "사랑만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는 드물지만 사랑 없이는 어떤 관계도 형성할 수 없죠. 열정도 똑같다고 봐요. 뜨거움을 유지하긴 힘들지만 그 뿌리마저 잃는다면 무슨 일도 할 수 없을 거예요."영화 속 하재관은 검투사 교관과 흡사하다. 후배 기자들에게 특종을 강요하고, 설사 문제가 발생해도 불도저처럼 자신의 생각대로 밀어붙인다. "언론사 부장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이번에 확실하게 알았어요. 고유 권한이 상당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의아했는데 나중에는 이해가 됐죠." 정재영이 발견한 것은 가족애였다. "책임을 지는 범위가 크더라고요. 그만한 권한이 주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기자들은 선배를 부를 때 뒤 '님'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잖아요.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날선 분위기에서도 상대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듯해요."

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스틸 컷

사실 하재관은 갑(甲)이 아니다. 경영난을 겪는 신문사에서 언제 책상을 정리해야 할지 모를 만큼 입지가 불안하다. 그래서 정재영은 하재관과 도라희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대화에서 툭 던지듯 '이렇게 하다가는 나처럼 된다'라는 애드리브를 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쉽게 꺼내는 당부 같지만 사실 자아비판이 담긴 아픈 말이잖아요. 둘의 위치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면서 공감대를 만들고 싶었죠." 하재관은 정재영이 연기한 KBS 드라마 '어셈블리' 속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진상필 의원과 닮은 구석이 많다. "두 캐릭터 모두 을(乙)에 가깝죠. 더 현실적으로 그려진 건 하재관이고요. 내색하지 않지만 부서원들을 살려보겠다고 안간힘을 쓰잖아요." 정재영은 기운을 잃은 후배들의 목소리에 자주 귀를 기울인다. 상담사를 자처하는 이유는 그에게도 도라희와 같은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스틸 컷

"19년 전 단역으로 출연한 '박봉곤 가출 사건(1996)'에서 애드리브를 많이 해 동료를 당황하게 만든 적이 있는데 누구도 저를 나무라지 않았어요. 주연으로 출연한 안성기(63) 선배가 박수까지 치며 응원해줬거든요. 촬영장 뒤에서 휴대용 버너 불에 손을 녹이며 해주신 따뜻한 말씀을 들으며 좋은 선배가 되겠다고 다짐했는데. 아직 철이 덜 든 것 같네요. 하재관보다는 좋은 선배로 남아야 할 텐데.(웃음)"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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