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안 듣고 운동만...왜곡된 학원스포츠 현실에 연 1만여명 은퇴 운동 선수들 '취업난' 호소...정부 청년실업 대책서도 사실상 소외돼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원다라 기자] "내가 한 때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스포츠 스타와 운동하면서 겨뤘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영어도 못하고 시사 상식도 모자란 '무식한' 실업자일 뿐이다." 지난 14일 오전 서울 구로구 구로3동에 위치한 한 취업 정보 업체의 강의실은 주말임에도 공부 열기로 가득했다. 30여명의 학생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채 강사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의자에 앉아 있는 이들은 뜻밖에도 우락부락한 덩치의 청년들. 한 눈에 봐도 평소 공부와는 담을 쌓았을 것 같았다. 이런 사람들이 주말 데이트를 즐기거나 '불금'의 후유증에 집에서 누워 있을 토요일 이른 시간에 강의실에서 공부에 빠져 있다니? 이들은 다름 아닌 전직 운동선수들로, 한 취업 정보 업체가 주최한 '은퇴 선수 취업 지원 프로그램'에 참석 중이었다. 이들은 한 때는 류현진, 추신수, 이동국, 박주영, 이천수, 이승엽 등 처럼 유명한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자웅을 겨뤘던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 '청춘'을 다 바쳐 많게는 10여 년간 각종 스포츠 종목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국가대표에 뽑히거나 메달을 따내는 등의 성적을 쌓지 못해 결국 체육 분야에 취업을 못했다. 또 우리나라 체육 교육의 특성상 학과 수업은 거의 도외시하고 운동 연습에만 매달려 일반 기업 취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은퇴 선수'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최근 청년 실업자 수가 사상 최고치를 갱신하는 바람에 쏟아지고 있는 각종 청년 취업 대책에서 마저 소외된 처지였다. 외국어 실력은 물론 기본 상식 등이 부족해 정부가 청년 실업 해소를 위해 지원하는 각종 인턴이나 직무 연수 프로그램 등에 지원할 엄두 조차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날 특강 현장에서 만난 A씨가 대표적 사례다. A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스피드 스케이팅선수였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대학교 3학년까지는 태권도 선수로 활동했다. 그동안 학교에 소속은 되어있었지만 수업은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평범한 학교생활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국가대표 메달'을 따지 못한 채 스물다섯 살에서야 '취업'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어지간한 기업에서는 다 본다는 '인·적성 시험'도 '토익' 공부를 얼마전에야 시작했다. A씨는 "인생의 반 이상 '체육인'으로 살았는데 일반인이 돼 취업하려니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며 한숨을 쉬었다. A씨와 같은 '은퇴 선수'는 한 해 1만 명에 이른다. 대부분 이십 초중반에 학교를 졸업했지만 국가대표 또는 메달리스트가 되지 못한 경우에는 체육 관련 분야로 나가려고 해도 경력 인정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여느 대학 졸업 취업준비생들과 다름없이 '토익'이나 '인·적성'이다. 하지만 학교 수업을 거의 받지 못하고 운동만 해 온 은퇴 선수들에게 토익과 인·적성 시험 준비는 일반 취업준비생들보다 훨씬 어렵다. 이날 특강에 참석한 B씨도 "학교 다니면서 수업 들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연습하러 간다고 하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업을 빠지게 해줬다"며 "일본이나 해외에서처럼 학교 전체 수업을 듣게 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영어나 수학 같은 기본적인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들은 정부의 청년취업지원정책에서도 사실상 배제된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불만도 많았다. 10년간 해온 유도를 그만두고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는 C씨는 "다른 취업준비생들 특히 IT나 과학과 같은 분야는 산업인력공단이 해외 연수 시켜주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는데 은퇴선수들을 위한 취업프로그램은 전무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대한체육회 같은 기관이 그나마 은퇴 선수들을 대상으로 인·적성 강의같은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불과 2년 밖에 안됐다"면서 "운동만 하던 은퇴선수출신 취업준비생들은 당장 뭐부터 해야 할 지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고 했다. 뜻밖에 이날 만난 은퇴 선수들 사이에선 우리나라 체육관련 기관들까지도 메달리스트 이외의 운동선수 출신들은 채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격을 15년 했다는 D씨는 "중1때부터 사격선수로 활동해 누구보다 체육현장에서 체육인으로 살아왔지만 막상은퇴를 하고 체육 관련 회사나 기관에 취업하려고 보니 경력은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영어’가 발목을 잡았다"며 "실제 주요 체육 관련 단체인 국민체육진흥공단과 대한체육회에는 '메달리스트 우대 전형'이 있지만 ‘메달’을 따지 못한 비국가대표 운동선수들 우대전형은 없다"고 한탄했다. 이에 대해 이날 강의의 주최 측인 김수진 취업포털 커리어 HR사업3팀과장은 "은퇴선수들은 대체로 학교 다닐 때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해 영어라든지 취업준비를 할 때 취업상담이나 교육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에 부끄러워하거나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며 "2013년 90명에 그친 특강 참가자가 지난해에는 180명으로 늘어나는 등 갈수록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특강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했다.이날 강의는 토요일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명 신청에 총 25명이 출석했다. 세 시간 남짓한 강의시간 내내 한눈파는 사람도, 조는 사람도 없이 강의가 진행됐다. 그만큼 은퇴선수들의 다급한 처지를 반영하는 듯 했다. 한 체육단체 관계자는 "아무리 운동선수로 열심히 살았다 하더라도,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운동만 하다가는 은퇴한 이후에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며 "우리나라도 청소년기에 최소한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원다라 기자 supermoo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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