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6장 봄비 내리는 아침 (109)

“자, 여기 종이하구, 그리고 볼펜하구 줄테니까....”하림이 소연 앞에 종이와 볼펜 한 자루를 놓아주며 말했다.“한번 써봐.”“뭘....?”“시 말이야. 시 한번 써보라구.”“에게게. 가르쳐준다고 하시더니....”“시키는대로 하셔. 일단 볼펜을 잡고, 깊은 숨을 한번 쉰 다음.... 그렇지.”소연이 억지춘향으로 따라 하는 척 했다.“그래, 좋아. 지금 밖엔.... 봄비가 내리니까, 제목은 봄비로 하는게 좋겠어. 지금부터 봄비라는 시를 쓰는 거야. 알겠니? 시작!”그런 다음, 하림은 너 알아서 하라는 투로 다시 자기 노트북 앞에 앉아 아까 하던 모헤조다로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쓸 준비를 했다.“이게 다예요?”“응. 그게 다야. 다 되면 나한테 보여줘.”“강의는 없어요? 어떻게 쓰면 된다, 그딴 거....”“그런 건 없어. 그냥 자기 생각과 느낌대로만 쓰면 돼.”하림의 말이 신통치 않게 들렸는지 소연이 풋, 하고 웃었다.“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면 어떡해요? 지금 그런데.”“아까 말했잖아. 기다려라. 시가 찾아올 때까지.....”“하림 오빠, 진짜 선생 맞아요?”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소연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하림은 전혀 흔들리는 기색이 없이 말했다.“아무 생각도 느낌이 들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생각이나 느낌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러면 저 깊은 곳에서 자기도 몰랐던 이미지 같은 것, 어떤 느낌들, 슬픔이건 기쁨이건 또는 그리운 일이나 얼굴, 이런 것들이 떠오를 거야. 그걸 시상이라고 하지. 시상이 떠오르면 그것을 그대로 종이에다 쓰면 돼.”“시상....?”“응. 자, 예를 들어 어떤 시인은 봄비를 고양이 걸음으로 온다, 고 했어. 왜 고양이 걸음이라고 했을까? 가만가만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에서 가만가만 소리없이 걷는 고양이 걸음의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겠지. 그런 식으로 얼마든지 이어나갈 수 있잖아.”“그럼, 그게 마리오가 파루다에게서 배웠다는 은유가 그거예요?”“그렇지. 그럼 우리도 한번 해볼까? 내가 먼저 하지. 음, 그래, 봄비는 계집아이 볼처럼 간지럽게 내린다.”그리고나서 소연이 너 차례란 듯이 쳐다보았다. “음.... 난 뭐라 할까? 봄비는.... 음... 개나리처럼 노랗다....? 이상하죠?”“아니. 그럴 듯 한데...? 봄비는 개나리처럼 노랗다....?”하림이 후후거리며 웃었다.“웃지 마요.”“알았어. 딱 하나만 더 가르쳐주지. 각 단어에는 이미지가 숨어있지. 음식엔 각 재료마다 맛이 있는 것처럼.....봄비, 개나리, 노랗다, 그런 단어엔 그들만의 맛이 있어. 그걸 이미지라 그래. 그런 이미지들은 때때로 조화하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면서 음악소리를 내지. 우리가 늘 쓰던 말도 시가 되는 순간, 음악처럼 소리를 내.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이런 식으로 말이야. 시란 그 음악적 이미지들을 통해 자기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보여주는 거야. 그리움이나 슬픔 같은 것 말이야.” “이미지라.....알았어요. 냅둬요. 한번 써볼테니까.”하림의 말이 어려워지자 소연이 종이를 자기 앞으로 당겨 놓으며 말했다.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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