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면. 작은 시골 역. 지역 신문 기자가 마침 취재를 나왔다가 그들 모리츠 가족들이 상봉하는 모습을 보고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한다. 그런데 모리츠 아내가 데리고 온 아이 중 하나의 머리가 노랗다. 눈 색깔도 다르다. 자기 자식이 아닌 것이다. 망설이는 모리츠....망설이는 모리츠와 초조한 기색의 아내, 영문을 모르는 채 그 곁에 서있는 노랑머리의 눈동자 색깔이 다른 아이. 그 아이는 적군이 아내의 몸을 통해 뿌려놓고 간 씨앗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신문 기자는 극적인 가족상봉의 사진을 만들려고 포즈를 취해보라고 채근을 한다. 마침내 모리츠 역의 주인공 안소니 퀸은 아이를 번쩍 안고, 아내와 꼭 붙어선 채 바보처럼 커다랗게 웃는다. 정말 허허거리며 웃는다. 순간, 사진 기자의 플레쉬가 터진다. 그때, 그 웃음. ‘25시’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안소니 퀸의 그 허허거리던 바보 같던 웃음. 그것은 영원히 하림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린이집 놀이터 작은 그네에 꽉 끼게 앉아 건들거리며 은하를 기다리는 자기가 바로 그 바보 같은 웃음의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가당치도 않은 상상이었다. 자기가 안소니 퀸처럼 멋있지도 않았고, 더더구나 은하는 적군이 남기고 간 씨앗도 아니었다.하림은 풋, 하고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런 상상이 들었을까.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한 이유가 있긴 있었다. 어쨌거나 은하는 적군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때의 연적이었던 태수 선배가 남기고 간 흔적이었다. 미워하려면 미워할 수밖에 없는 흔적이었다.처음 혜경이 은하를 데리고 났을 때가 기억났다, 하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우리 딸 은하. 예쁘지?”혜경이 그렇게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고, 하림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었지만 가슴 한쪽은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아렸다. 빤히 하림을 쳐다보는 은하의 눈에서도 경계의 빛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낯선 아저씨라 그럴 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림은 그 눈빛에서 태수 선배와 닮은 눈빛을 보았다. 눈빛 뿐 만이 아니었다. 이마에서도, 약간 길고 구부정한 코에서도, 꼭 다문 입술에서도 태수 선배의 그림자가 보였다. 은하는 어김없는 유전의 법칙에 따라 제 아빠와 엄마를 반반쯤 섞어놓은 모습이었다.“그래. 예쁘구나. 은하야, 이제부텀 아저씨랑 친구하자.”하림은 안소니 퀸처럼 은하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하림의 품에 안긴 은하는 가볍게 몸을 틀어 저항하는 듯 하다가 곧 체념한 듯 가만히 있었다.그래서 둘이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그래도 은하는 예뻤다. 하는 행동도 예뻤고, 말도 예뻤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의 아빠 태수 선배도 멋있는 남자였고, 그의 엄마 혜경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를 엄마 아빠로 둔 아이가 예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은하가 물었다. 둘이 좀 친해졌을 무렵, 이 놀이터에서였다. 은하는 그네를 타고 있었고, 하림은 그네를 밀어주고 있었다.“아저씨, 하느님은 몇 살이냐?”“응?”하림이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있자 은하가 또 물었다.글 김영현/그림 박건웅<ⓒ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사회문화부 정종오 기자 ikokid@ⓒ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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