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 원전 1호기 블랙아웃 '사건의 재구성'

[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전원 공급 중단 사태는 사실상의 인재(人災)로 드러났다. 늑장보고와 조직적 은폐, 거짓말까지 종합 세트로 이뤄진 블랙아웃 사태를 발생 시점부터 시간 순으로 재구성해 봤다.2월9일 오전 11시. 김종신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지식경제부를 찾았다. 지난 연말부터 연이어 터진 원전 정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삼진 아웃제와 최고가치 낙찰제를 도입하겠다는 방지 대책을 들고서다. 대외 소통을 강화하고 직원의 사기를 진작하는 방안도 제시했을 만큼 의욕에 가득 찼다.그러나 같은 날 저녁 8시34분. 김 사장의 의욕에 찬 브리핑이 있고난 후 불과 반나절도 안 돼 고리 원전 1호기는 갑자기 작동을 멈췄다. '블랙아웃(대정전)'이다. 전원 공급 중단은 무려 12분간 지속됐다. 당시 현장에 있던 직원은 100여명 안팎. 이 사실을 김 사장은 전혀 몰랐다.책임자인 문병위 고리 제1발전소장은 물론 고리 원전 직원들이 하나같이 입을 닫았기 때문이다. '조직적 은폐'를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 김 사장이 지경부를 찾은 날인 데다 잇따른 원전 정지, 핵안보정상회의 등 현안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면서 문책을 받을까 두려웠다고 한다.그로부터 10일이 훌쩍 지나 2월20일.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고리 원전 1호기 사고의 불씨는 부산시의 한 식당에서 되살아났다. 주민들끼리 오가는 대화를 부산시의회 김수근 의원이 우연히 엿듣게 된 것이다. '원전 전원이 차단됐는데 비상 발전기가 안 돌았다. 아무 상관이 없나'하는 내용이었다. 얼핏 듣기에도 아찔한 내용에 김 의원은 의문을 품고 사건을 파기 시작했다.다시 2주일이 흘렀다. 3월2일. 때 마침 울산에서 국제원자력대학원 입학식이 열렸다. 그 곳에서 김 의원은 문 소장의 상급자인 정영익 고리 원전 본부장을 만나 정황을 듣고자 했으나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는 회피성 답변에 의구심은 커졌다고 했다. 공교롭게 이날 한수원은 대대적 인사를 단행했다. 어이없게도 한수원은 고리 원전 1호기 사고와 관련한 핵심 관계자를 줄줄이 '좋은 자리'로 영전시켰다. 정 본부장은 한수원의 월성원자력본부장으로, 문 소장은 본사 위기관리실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특히 은폐를 주도했던 문 소장에게 위기관리실장이란 중책을 맡긴 것은 보고 체계의 허술함과 한수원 조직의 수준을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닷새 뒤인 3월7일. 여전히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던 김 의원은 고리 원전에 근무하는 김기홍 대외협력처장에 연락을 했다. 다음날 점심 직후 그를 만난 김 의원은 조심스레 "전원 차단 소문이 돌고 있으니 확인해보라"고 전했지만 이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보도자료를 통해 고리 원전 1호기 사고를 공론화한 것은 또 6일이 흐른 3월13일. 그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은폐했던 정보가 조금씩 새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고리 원전 측은 신임 본부장을 통해 한수원의 김 사장에게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김 사장이 정확히 대면 보고를 받은 시점은 11일 오후 4~5시경. 또 다시 김 사장이 지경부와 원자력안전위 등 정부 당국에 정식 보고한 것은 이튿날. 그렇게 시간은 사고 발생 시점으로부터 한 달하고도 4일이 흘렀다.
이번 고리 원전 블랙아웃은 단순한 정비자 실수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문책에 대한 두려움에 따른 조직적 은폐와 고질적인 보고 체계의 구멍, 책임 소재 불분명 등이 겹치면서 사상 초유의 인재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고리 원전 1호기의 블랙아웃이 '조직적 은폐'로 초점이 옮겨지면서 정부 당국자 사이에선 책임 공방이 치열하다. "우리는 몰랐고 책임도 없다"며 원전 관련 기관이 모두 한 발짝 물러서는 모양새가 가관이다. 이는 국내 원전에 대한 안전ㆍ규제는 대통령 소속 독립위원회인 원자력안전위가, 운영 및 정책은 지경부 산하 한수원이 담당하는 등 뿔뿔이 흩어진 탓이 크다.홍석우 지경부 장관은 "지경부는 원자력안전위의 조사가 마무리되면 관계자 엄중 문책을 포함한 제반 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수원 김 사장은 "심한 자괴감을 느낀다"며 "책임질 사항이 있다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말했다.김혜원 기자 kimhy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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