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모 기업 홍보담당 임원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골프 얘기, 자식 얘기,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건강 문제로 화제가 옮겨갔습니다. 그분은 몇 년 전 암 투병을 하며 겪었던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담당 의사가 정밀검사를 받자고 하데요. 정밀검사 결과 위(胃)에 2cm 정도 되는 암 덩어리가 있다는 거예요.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그 날은 마침 회사가 기자회견을 통해 중대발표를 하는 날 이었습니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부하직원이 들어와 기자들이 기다린다고 하는 거예요. 발표할 내용을 메모지 적어놨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래도 어떡하겠습니까. 회견장에 나가 메모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기계적으로 읽어 내려갔죠. 주말엔 아내와 강화도에 갔습니다. 그 때만해도 위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새롭게 보이더군요. 바다도, 갈매기도, 석양도…. 하루가 하루가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판정을 받은 후 의사로부터 치료법을 듣기 전까지는 밤마다 악몽을 꾸는 등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 분은 암 투병 이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이 먹던 술도 끊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삶을 대하는 자세도 바뀌었습니다. 당시에는 “왜 내게 이런 일이…”라며 좌절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게 감사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순간에는 잘 나가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생각됐지만 그 브레이크 때문에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는 것이지요. 그 이후 자신을, 아내를, 가족을 더 사랑하게 됐다는 게 그 분의 고백입니다. 그 분과 헤어진 후 그 분의 인생고백을 떠올리니 김정현이 쓴 <아버지> 란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가정과 사회에서 중요한 존재이지만 항상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췌장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아버지는 차분하고 냉철하게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부권(父權)이 추락한 시대에 상징적인 죽임이 아니라 현실로 닥친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와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소설입니다. 이 시대, 아버지는 힘듭니다. 특히 엄습한 불황은 아버지들의 어깨를 더욱 짓누르고 있습니다. 정년퇴직한 아버지도,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온 아버지도, 일만 생각하다 건강을 잃은 아버지도, 모두 가슴에 눈물을 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운이 좋아 직장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행복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은 직장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들은 ‘생존자 신드롬’의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이 신드롬의 특징은 일단 자리는 지켰다는 데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향후 또 구조조정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고, 동료가 쫓겨났다는 생각에 죄책감도 느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를 부활시킵시다. 가부장적 질서의 상징에서 꺼내 이해하고 감싸야하는 존재로 인식합시다. 때마침 한국소설에서 아버지가 돌아왔다고 하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서하진 소설집 <착한 가족>에 수록된 단편 ‘아빠의 사생활’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딸들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해외까지 가서 아버지가 부정행각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아버지가 가여워 진다”고 고백하는 딸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자식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나온 조경란의 단편 ‘기타 부기 부기우기’는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반목하던 형제들이 모여 아버지의 애창곡인 ‘기타 부기’를 부르며 화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술주정뱅이 남편, 때리는 아버지, 가족을 내팽개치는 가장의 모습을 다루던 예전과는 확 달라진 아버지를 만난 수 있습니다. 불황시대에 가족을 책임질 사람도, 경제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할 사람도 아버지들입니다. 이 시대 아버지들에게 박수를 쳐주십시다. ‘아빠! 힘 내세요’ 라며…. 이코노믹리뷰 강혁 편집국장 kh@ermedia.net<ⓒ아시아 대표 석간 '아시아경제' (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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