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 감독 '어느 날'로 돌아온 배우 김남길
절제된 연기 거듭 도전하는 몇 안 되는 배우
혼수상태 빠진 여자 만나 위로하는 이야기 '어느 날'
대사 없이도 무료한 얼굴·섬세한 호흡으로 쓸쓸한 기운 조성
"죄책감에 시달려 방황하는 모습, 진하게 나타나길 바랐다"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절제된 연기로 영화 전체를 이끄는 배우는 많지 않다. 그런 시나리오도 적지만, 제안을 받는 배우도 스무 명 안팎이다. 이마저도 어려운 연기와 낮은 상업성으로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굵은 목소리에 한껏 힘을 줘 감정을 폭발하는 연기에 다들 익숙해져버렸다.
배우 김남길(37)은 이런 한계에 계속 부딪히는 몇 안 되는 배우다. 인물의 속내를 덜 표현하면서도 묘한 긴장을 조성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오승욱 감독(54)의 '무뢰한'에서 그린 정재곤이 대표적이다. 살인마인 박준길(박성웅)을 뒤쫓는 형사로, 그의 애인 김혜경(전도연)에게 접근하면서 마음이 요동친다. 모든 것이 망가질 수 있는 세계임을 직감하지만, 결국 불길로 뛰어든다. 이 영화는 김남길이 합류하면서 털끝까지 묘사한 미술 작품처럼 섬세해졌다. 애초 선 굵은 결과물을 예상한 이들이 많았으나, 그의 절제된 대사와 무료한 얼굴에 고독하고 쓸쓸한 기운이 고르게 퍼졌다.
이윤기 감독은 '어느 날'을 맡으면서 이 연기를 곱씹었을 것이다. 하이에나 같은 섬뜩한 표정만 바꾸면 아내를 잃은 강수의 마음이 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으리라. 어느 날은 강수가 혼수상태에 빠진 미소(천우희)를 위로하는 이야기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갈등에 부딪힌다. 이 감독은 직접적인 대사 대신 지문을 많이 넣었다. 그런데 코믹한 장면을 여럿 삽입해 쓸쓸한 기운을 유지하는데 애를 먹는다.
지난 4일 삼청동 카페 웨스트19에서 김남길을 만났다. 그는 "함축적인 표현을 하기보다 배역의 다양한 면면을 보여주는데 집중했다"고 했다. "환자의 가족이 겪는 어려움을 넘어 존엄사까지 다루다 보니 배역의 감정 변화를 이해하는 데 공을 많이 들여야 했다. 강수 개인의 아픔을 부각하기보다 이를 어떻게 끌고 갈지를 고민했다."
아내를 떠나보낸 강수는 개인적인 아픔을 나타내는데 서툰 인물이다. 자신의 처지를 누군가가 알아주거나 이해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김남길은 이런 특징을 특별한 사건도 없는 초반부터 명확하게 표현해야 했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거나 야구 연습장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신 등이다. "야구공을 치다가 멈추고 눈물을 흘릴 만도 하지만, 이마저도 인위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보다는 무료함이 더 클 것 같았다. 답답한 가슴을 억누르기도 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려 방황하는 모습이 더 진하게 나타나길 바랐다."
이 감독은 클로즈업 쇼트로 김남길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담는다. 풀 쇼트에서는 뒷모습을 자주 조명한다. 충무로의 많은 감독들이 엄지를 치켜세운 컷이다. 왜소한 체구는 아니지만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이 뭔가 허전해 보인단다. 오승욱 감독은 무뢰한의 첫 장면부터 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막 주차하고 어두운 골목으로 향하는 정재곤을 뒤에서 롱 테이크(쇼트가 편집 없이 길게 진행되는 것)로 따라붙는다. 조금 구부정하게 걷다가 주머니에 두 손을 넣는 모습은 수컷의 기운과 감정의 결핍을 동시에 가리킨다. 어느 날에서도 걷는 자세는 다소 불균형하다. 하지만 나타나는 감성은 무뢰한과 천차만별이다. "뒷모습을 찍으면서 울기도 했다. 아파하는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이 감성이 몸에 그대로 베일 수 있다고 본다. 이런 표현을 좋아한다. 인물이 가진 기운을 보여주는 동시에 관객에게 색다른 궁금증을 줄 수 있다."
사실 이런 감성은 모든 관객이 알아챌 수 없다. 영화 감상에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김남길은 "일상적인 연기가 그래서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아픔을 표현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실제로 곤경에 처해도 대부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낸다. 이를 표현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어차피 배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인물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간극을 줄여보겠다."
그의 바람은 훌륭한 연출까지 뒷받침돼야 실현될 수 있다. 어느 날은 지나치게 삽입된 음악과 갈피를 잃은 촬영으로 강수와 미소의 감정 흐름이 자주 끊긴다. 후반에 이르러서는 감정 전달을 포기하고 전사를 설명하는데 집착하기도 한다. 미소보다 덜 부각되는 나이롱환자 최두용(윤제문)과 강수의 관계가 오히려 설득력 있다. 특히 짧은 대사로 구성된 편의점 신은 두용의 처지를 인지한 강수가 자신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낸다는 점에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나 역시 그 장면을 좋아한다. 제문이 형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셔서 기대 이상의 정서가 조성됐다. 촬영 직전 불미스러운 소식이 전해져서 걱정했는데, 모든 대사가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형님, 힘내세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김남길은 이런 연기에서 비롯된 정서적 치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배역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입장에서 때로는 상대 배우의 따뜻한 대사 한 마디에 모든 피로가 씻겨 내려간단다. "배역에 몰두해 대화를 하다보면 개운함을 느낄 때가 있다. 대사를 인식하고 연기하면 절대 느낄 수 없는 쾌감이다. 그 짜릿함에 매료돼 지금껏 배우로 달려온 것 같다.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테고."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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