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시대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은 각별하기 마련. 유독 조선왕조의 군주 중 지도자로서의 강인함이 부족했던 선조는 왜군에게 자신의 나라를 짓밟혔고, 아들 둘(임해군, 순화군)이 전란 중에 볼모로 붙잡혀갔던 탓에 1년 만에 다시 마주한 자식 앞에선 너무도 약해지는 아버지였다. 그리고 이런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한 아들을 망쳐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의 여섯째 아들, 순화군 이야기다.
선조와 후궁 순빈 김씨 사이에 태어난 순화군 이보는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었다. 새나 짐승을 잡아 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잔인하게 상해했던 것. 통상 사이코패스적 기질의 전조현상으로 읽히는 동물 학대 증상을 그는 유년시절에 내비치고 있었다.
그의 나이 13살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린 나이임에도 전장에 나간 순화군은 형인 임해군과 함경도 회령에 주둔 중에 전쟁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함경도 양민들에게 왕자의 신분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다 전세가 악화됨에 따라 지역의 반란군에게 붙잡혀 임해군과 함께 왜군에 볼모로 넘겨졌다.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던 1년의 시간은 그의 포악한 성질을 더욱 악화시켜 난동과 행패에서 그치던 것이 본격적인 살인으로 이어져 종내에는 매년 10명 가까이 되는 양민을 죽이는 연쇄살인마가 되어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궁으로 돌아온 뒤엔 선조의 첫째 부인인 의인왕후 박씨가 죽어 장례를 치르는 중에 그녀를 모시던 궁녀를 왕후의 관이 모셔진 빈전 옆 천막에서 강제로 붙잡아 끌고 와 겁탈했다.
도무지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볼모로 보낸 시간에 대한 미안함으로도 부모의 상 중 범간한 죄는 용서하기 어려웠던 선조는 급기야 자신이 승지에게 직접 지시내용을 적어 전하기에 이르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오늘 빈전(殯殿)의 곁 여막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궁녀)를 겁간하였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겠으나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군하(群下)를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
- 선조실록 127권 33년 7월 16일
법으로만 따졌다면 순화군의 죄는 응당 사형이었으나 신하들은 함부로 왕이 아끼는 왕자의 사형을 고할 수 없었다. 결국, 선조는 순화군을 지방으로 유배 보냈으나 가는 유배지마다 사람을 죽이고, 무고한 양민을 잡아다 쇠망치로 이를 깨부순 뒤 집게로 잡아 뽑는 만행을 저지르자 다시 서울로 불러들였고, 가택연금을 시켜도 이내 빠져나와 사람을 죽이고 잡아 패는 행패를 그치지 않는 순화군을 선조는 금위군 무사를 보내 빠져나올 수 없게 단단히 가택 연금시켰고, 그 기간 중에 풍을 맞고 쓰러져 거동을 못 한 채 병상에 있다 몇 해 뒤인 1607년 28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그의 범죄 행각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선조실록에 조목조목 기록되어있는데, 이를 바라본 당대의 여론이 어떠했는가는 선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의 말에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사관은 이같이 논한다. 임금도 이를 억제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이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하나의 왕자(王子)를 죽이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백성은 무슨 죄인가."
- 선조실록 177권 37년 8월 7일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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