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녀 "지난 10년간 이 무대를 지켰다. 앞으로도 힘이 다할 때까지 서고 싶다"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여러분, 안녕하세요. 이 자리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10년 동안 이 무대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 덕분입니다."
배우는 천천히 객석에서 걸어 나와 무대로 향했다. 하얀 파자마 차림으로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채 관객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등장했다. 지난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년째 연극 '벽 속의 요정'을 혼자 책임지고 있는 배우 김성녀의 모습이다. "앗, 저 아이가 또 왔네요. 저기 천장 위에 붙어 있는 저 꼬마애..." 관객들이 놀라 천장을 바라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극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어지는 2시간30여분의 시간 동안 김성녀는 혼자서 아이도 됐다가, 엄마도 됐다가, 남편도 됐다가, 경찰도 됐다가, 이웃사람도 되면서 1인 32역을 연기했다. 한 역할에서 다른 역할로 넘어가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매끄러워서 마치 32명의 배우들을 만난 느낌이다. 짧은 시간 동안 혼자서 한 편의 대서사시를 만들어내는 그 솜씨와 에너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벽 속의 요정'은 스페인 내전 당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1936년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발발한 후 끝내 프랑코 장군이 집권한다. 이때부터 공화국 정부를 지지했던 마누엘 코르테스는 처형당할 것이 두려워 자신의 집에서 숨어 지낸다. 독재정권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고, 코르테스는 그 30년의 시간을 고립된 채로 지내야했다. 이 실화는 나중에 책으로 알려졌고 일본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이 책을 보고 극으로 만들었다.
'집안에서 30여년의 세월을 보낸 남자 이야기'는 다시 배삼식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한국적 상황에 맞게 새롭게 각색됐다. 스페인 내전처럼 좌우대립을 겪은 일제 말기부터 1990년대까지로 배경을 옮겼다. 우리의 가슴 아픈 근현대사의 순간순간들을 베를 짜듯 차곡차곡 엮어나가는 과정이 소박하면서도 경이롭다. 극 중 그림자극으로 펼쳐지는 전래동화는 신화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작품에서의 '벽'은 은신처이자 피난처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로 몰려 벽 속에 숨어지내 게 된 아버지, 그 빈자리를 혼자 감내해가며 가정을 지켜나가는 어머니, 아버지를 벽 속의 '요정'이라 믿으며 성장해나가는 딸 등 이 가정은 혹독하고도 모진 시간을 꿋꿋하게, 웃으며 버텨 나간다. 사방이 어둠인 벽 속에서 아버지는 딸이 따다 준 나뭇잎과 꽃잎, 햇빛을 의지하며 희망을 찾는다. 끝내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는 이 작품의 힘은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강력하다. 극 중 김성녀가 천연덕스럽게 관객들에게 가짜 계란을 파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벽 속의 요정'은 남편인 손진책 연출가가 지난 2005년 결혼 30주년을 맞아 아내 김성녀에게 선물한 작품이기도 하다. 무대가 끝나고 32명의 인생을 보여준 배우가 말한다. "'벽 속의 요정'은 정말 만만치않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관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지난 10년간 꾸준히 무대에 올랐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또 약속을 드리자면, 몇 년이 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 작품을, 무대를 지키겠습니다." (16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