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그것이 알고 싶다> ‘어느 시골 마을의 추악한 비밀’을 보고 나니 몇 시간이 흘러도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요. 도대체 분통이 터져서 잠이 와야 말이죠. 자식보다 더 어린 이웃집 딸을 상대로 수년 동안 성을 착취해온 인면수심의 한 남자가 옆방 사람의 고발로 검거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더군요. 8살짜리 지능을 가진 지적장애 2급인 고등학생을 천 원짜리 몇 장으로 꼬이고 협박해 이틀이 멀다 하고 제 욕심을 채워왔다는데요. 그런데 형이 확정된 후 문제의 이발사가 경악을 금치 못할 이야기를 피해자 가족에게 털어 놓았다고 합니다. 수십 명이 함께 구속될 줄 알았건만 외지 사람인 본인만 형을 살게 된 게 억울하다는 하소연이었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또 한 명이 조사를 받았고 놀랍게도 그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6촌 지간인 인척이었어요. 불과 500 미터 안에 사는 터라 아이의 성장 과정을 다 지켜봤을, 그리고 ‘큰 아빠’로 불렸다는 이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더라고요.
천인공노할 짓에 피가 거꾸로 솟구칩니다
가해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십여 명, 그중 한 명은 구속되었고 다섯은 수사가 진행 중이라지만 누군지 확인할 길이 없다보니 소문만 무성한 바람에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사건이 드러난 지 꼬박 한 해가 지난 이 시점까지 단 한명의 실형만이 확정되었다는 부분이 영 미심쩍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마을 전체의 담합이 의심되고 있는 상황인데요. 지나가는 행인을 때려도 바로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는 게 우리네 법이 아니던가요? 흔히 드라마에서 보면 애걸복걸 사정이라도 해서 합의가 되어야 겨우 풀려나는 거잖아요? 영화 <도가니>에서도 돈으로, 말로, 회유한 끝에 피해자와 합의하고 복직한 뻔뻔한 인간 말종들이 있었죠. 그런데 성폭행, 그것도 지적장애를 지닌 미성년자를 유린한 범죄자들을 구속 수사조차 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지역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는 얼굴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자신이 당한 정황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건만 지적장애라 하여, 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대지 못한다 하여, 오히려 피해자의 증언이 의심을 받고 있으니 피가 거꾸로 솟구칠 일이지 뭐겠어요.
“얘기만 듣고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들 말아요. 모자라서 그런단 말이에요. 모자라지, 그러면 그 가시내가 정상입니까?” 기소된 한 남자의 처가 한다는 소리가 가관입니다. 가수 소희도, 원더걸스도 알고 있고 엠블랙과 2PM을 좋아한다는 아이가, 사진 잘 안 나오니 찍지 말라며 얼굴을 가릴 줄 아는 아이가 설마 사람 구분을 못할까요? 오토바이를 태워서 데리고 갔다, ‘아줌마 밭에 갔다, 아줌마 없다’고 했다, 입을 막으며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 차 뒷자리에 앉아 모자로 얼굴을 가리라고 했다, 이런 말들이 과연 다 꾸며낸 이야기겠어요? 큰아빠라는 사람이 데리고 갔던 모텔 방의 가구 배치며 컴퓨터가 있던 자리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누군가가 그저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아도 답답해 가슴을 칠 마당에 상처를 입은 가여운 딸아이의 고발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니, 부모 입장에서는 기구 절창할 일이죠. 피해 학생의 아버지는 가해자들의 집 앞을, 가게 앞을 지나며 1년간을 참고 또 참았다고 합니다. 자동차로 밀어버리고 싶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던데 왜 아니 그러시겠어요. 무엇보다 객지 생활을 접고 내려와 누구보다 의지했던 형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가해자 가족들이 부디 부끄러움을 알기를
살다보니 어지간한 남의 잘못에는 토를 달지 않게 됩니다. 언젠가 저 역시 의식 못한 채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르고 또 내 주위의 누군가가 피치 못할 사연으로 같은 전철을 밟을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번만큼은 화를 누르기가 어렵네요. 더 가슴이 조여 오는 건 이런 일들이 비단 이 마을에서의 일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겠죠. 얼마나 여러 곳에서 얼마나 많은 자들이 담합을 통해 지적장애여성들의 삶을 짓밟고 또 사건을 은폐해왔을지 짐작만으로도 눈물이 절로 납니다.
남자들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여자라면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한번쯤은 성추행을 당해본 경험이 있기 마련이에요.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요즘과는 비교 할 수 없게 미어터지는 만원 버스를 타야 했는데요. 통학 길, 사람으로 빼곡히 들어찬 버스 안에서 성추행이 참으로 빈번히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그 모욕감과 불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친구들에게는 털어 놓을 수 있을지언정 부모님에게는 차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죠. 아마 피해 여성들이 사실을 밝히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지 싶어요.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성추행에 관한 한 아직까지 개화가 덜 된 모양입니다. 따라서 피해를 입은 사람이 부끄러워할 사안이 결코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부터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에 하나 불행한 일을 당하더라도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가해자 가족들이 부디 부끄러움을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피해를 당한 아이의 문제, 아이 집안의 문제로 돌리는가 하면 오히려 생사람 잡는다며 딸내미 간수나 잘하라며 자기 가족만 감싸고 든다고, 둘러댄다고 능사는 아니니까요. 마을 주민 모두가, 아니 어쩌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추악한 사태를 애써 덮어온 공범이라는 사실, 절대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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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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