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조범자 기자]투병 끝에 별세한 '무쇠팔' 최동원은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프로야구를 빛낸 수많은 별들이 최동원을 보며 스타를 꿈꿨고 그와 닮기를 희망했다. 금테 안경을 쓴 채 무서우리만치 씩씩하게 공을 뿌리는 모습은 많은 팬들과 야구선수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연세대를 거쳐 1981년 실업야구 롯데에 입단한 고 최동원은 그해 17승1패라는 빼어난성적을 올리고 실업야구 최우수선수·최우수 신인·최다승리투수 등 3관왕에 올랐다.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해 한국의 우승에 힘을 보탰던 고인은 이듬해 연고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했다. 데뷔 첫해 성적은 이름값에 비해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9승16패4세이브, 평균자책점 2.89.
하지만 2년차인 1984년 51경기에 등판해 14차례 완투하며 27승13패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올렸다. 특히 그해 삼성과 한국시리즈에서 1,3,5,6,7차전 등 총 5차례나 등판해 홀로 4승을 챙기는 믿기 힘든 투구로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어 '괴물투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규 시즌에서 284⅔이닝이나 던졌던 그는 6차전 구원승을 빼고 1,3,7차전에서 모두 완투승(1차전 완봉승)을 거뒀다. 프로야구 30년 동안 7전4선승제로 열리는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올린 투수는 최동원이 유일하다.
이후 1985년 20승, 1986년 19승, 1987년 14승으로 롯데의 에이스로 활약한 최동원은 1986년과 1987년 세 차례에 걸쳐 선동열(해태)과 역사에 남을 선발 대결을 펼쳤으나 1승1무1패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하지만 1988년 현재 프로야구선수협회의 모태 격인 선수회 창립을 주도한 괘씸죄로 김시진과 전격 트레이드됐고 1989년 후반기에서야 삼성에 복귀해 8경기 1승2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결국 이듬해인 1990년 6승5패1세이브 성적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프로 통산 248경기에 출전해 103승74패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의 기록을 남겼다. 특 출전 경기 중 3분의1에 해딩하는 80경기를 완투(완봉 15차례)로 장식해 '무쇠팔'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은퇴 후 1991년 지방의회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한 그는 방송사 해설위원, 시트콤 배우 등으로 영역을 넓히며 새로운 인생을 열었다.
10년 간의 외도 끝에 2001년 한화 코치로 그라운드에 복귀한 고인은 2006년부터 3년간 한화 2군 감독을 지냈고 2009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관으로 그라운드를 지켰다.
그러나 2007년 대장암 투병 소식으로 팬들을 안타깝게 한 그는 그러나 지난 7월 군산상고-경남고 레전드 매치 때 눈에 띄게 야윈 모습으로 나타나 간암 투병설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최동원은 당시 "살이 쪄 식이요법으로 감량했는데 너무 뺀 것같다. 반드시 그라운드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투타에서 함께 프로야구 초창기를 주름잡았던 장효조가 별세했을 때도 "괜찮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이것이 팬들에게 한 마지막 약속이 되고 말았다.
스포츠투데이 조범자 기자 anju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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