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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바이든의 행복에 희생된 韓日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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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바이든의 행복에 희생된 韓日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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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통이다. 그는 1978년 베이징에 미국의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고 상원의원, 상원외교위원장 그리고 부통령의 자격으로 덩샤오핑(1979년), 장쩌민(2001년), 후진타오(2011년)를 그리고 2013년엔 시진핑과 회담하고 협상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은 2011년과 2012년에 8차례나 만났다. 바이든은 중국에 대해서 긍정적이었고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중국이 변화할 것이라는 바이든의 기대와 희망은 좌절로 변했다. 중국은 국유 기업을 확대해서 전략 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관리들은 외국 기업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강요해 기업 기밀을 노골적으로 훔쳤다. 경제 성장과 함께 정치체제는 더욱 권위주의화 되어갔다. 중국 경제가 성장하자 미국의 공급망이 허약해졌고 2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시진핑에 대한 바이든의 배신감은 중국 대책을 낳았다. 오바마-바이든 정부의 대중 압박정책인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 전략이다. 일본과 친숙한 백악관과 국무부 전문가들은 중국을 지역에 묶어두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밀착을 원했다. 문제는 한국이었다. 2002년에 터진 ‘미선이 효순이 사건’,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바로잡기 운동이 촉발한 위안부·강제징용·독도·동해표기 등 과거사는 한미는 물론 한일 간 갈등을 연일 악화시켰다. 미국 내 한인 사회의 노력이 응축된 연방 하원의 일본군 강제 위안부결의안은 한일 관계의 새로운 기준점으로 작용했다.


미국 정부는 급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의 중국 압박 전략의 실무 핵심인 웬디 셔먼 당시 국무부 차관은 2015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서울을 방문해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얻고 있다"라고까지 말했다. 한·미·일 3각 동맹이란 미국의 동북아전략을 염두에 둔 행보였지만 한국은 물론 미주 한인사회에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미주 한인들의 압박에 연방의원들은 국무부에 "미국에 인권을 앞서는 어떤 전략도 없다"는 메시지를 국무부에 전달했다. 진실에 기초한 과거사 정리 없이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밀착시키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며 국무부도 물러섰다. 오바마-바이든 정부의 ‘피벗 투 아시아’ 전략의 핵심인 한·미·일 동맹은 실현되지 못했다.


2021년 출범한 바이든 정부는 이번에도 대중 압박을 시도했다. 중국은 더 위협적으로 커졌다. 미국을 위해서 한국과 일본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문제는 더욱 중요해졌다. 과거의 전문가들이 다시 투입됐다. 백악관엔 ‘아시아 차르’ 커트 캠벨이, 국무부엔 웬디 셔먼이 중심에 포진했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국빈으로 워싱턴을 방문한 후 늦둥이를 돌보기 위해 캠벨이 물러난다는 소문이 워싱턴 정가에 돌았다. 캠벨과 호흡을 맞추어 온 셔먼은 아예 6월 은퇴 선언을 했다. 그들의 역할이 성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캠프 데이비드 3국 정상회담‘에서 공동의 가치, 상호 존중, 3국과 지역 및 세계의 번영을 증진한다는 ‘캠프데이비드 원칙’이 발표됐다. 한일 갈등 사안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내가 행복해 보인다면 그것은 정말로 지금 내가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위안부, 강제징용, 독도, 동해 표기에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면 한국민, 미주 한인들도 바이든의 행복에 공감하지 않았을까.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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