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계리 핵실험장 지하수…주민들은 식수로
방사성 물질 노출된 특산물, 韓中日로 밀수
'피폭 조사' 쉬쉬하는 정부…"결과 공개해야"
[아시아경제 장희준 기자]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발생한 방사성 물질이 지하수를 통해 주민 수십만명에게 확산될 위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특히 핵실험장 인근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의 밀수·유통으로 인접 국가인 한국과 중국, 일본까지 피폭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 담겨 주목된다.
대북 인권단체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은 21일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방사성 물질의 지하수 오염 위험과 영향 매핑' 제하의 특별보고서를 통해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핵실험장으로부터 유출되는 방사성 물질이 물을 매개체로 주민들과 주변 국가로 확산될 위험에 대해 종합적 개요가 제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영환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대표는 "그간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안보 문제로만 여겨졌는데 이번 보고서는 핵실험이 주민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 사람들의 생명권까지 위협하는 '인권 문제'라는 점을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핵실험장 아래 '방사능 지하수'…동해까지 흐른다
북한은 함경북도 길주군에 위치한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감행했다. 2017년 9월 6차 핵실험 땐 수차례의 자연 지진과 지반이 50㎝가량 가라앉는 지표면 변형까지 확인됐다. 방사성 물질의 유출 우려가 커진 것도 이 시기다. 당시 전문가 참고인으로 국회에 출석한 이수곤 서울시립대 교수는 "핵실험 뒤 계속된 지진들은 지반 균열과 방사능 누출을 시사한다"며 "무서운 건 지하수다. 아웃 오브 컨트롤(통제불능) 상태"라고 우려를 표한 바 있다.
보고서가 주목한 건 풍계리 핵실험장 일대의 지리적 구조다. 모든 지표수와 지하수가 순환하듯이 핵실험장 주변의 물도 여러 지점에서 합류하고 개천을 형성한다. 특히 핵실험장이 자리잡은 만탑산에서 발원하는 물을 '장흥천'이라 부르는데, 이 물길은 남쪽의 남대천으로 이어지고 그 일대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길주군 길주읍을 거쳐 화대군·김책시의 경계를 가로질러 동해까지 흐른다. 북한이 여름마다 물난리를 겪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확산 가능성은 더 커진다.
그럼에도 북한은 '방사성 물질 유출은 전혀 없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거나 외부의 현장 측정을 허용한 적은 없다. 2018년 갱도 폭파를 선전할 당시 한국과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등 기자단이 현장을 찾았을 때도 핵 관련 전문가는 배제했으며, 기자들이 챙긴 방사능 측정기도 행사 전 압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중앙TV 기자가 갱도 앞 개울물을 마셔보라고 권했다가 '먼저 마셔보라'는 말에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피폭 우려' 지하수, 北 주민들은 식수로 쓰고 있다
길주군 출신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을 조사한 결과, 북한 당국은 현재까지 핵실험에 앞서 주민들을 대피시키거나 사전 예고한 적이 없던 것으로 드러났다. 직접적인 피폭 위험에 노출됐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보고서가 크게 우려하는 대목은 핵실험장 일대 주민들이 '문제의 지하수'를 식수와 농업 용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길주읍에 거주했던 한 탈북민은 "아파트에 살았지만 수압이 약해 2층부턴 수도가 무용지물이었다"며 "대부분 공동우물(지하수)을 식수로 썼다"고 진술했다.
우리 정부도 이 같은 문제를 고려한 바 있다. 2016년 5차 핵실험 직후 국회에서 지하수 오염 가능성과 핵실험장 일대 주민들의 식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고, 국정감사에 참석했던 홍용표 당시 통일부 장관은 "길주군에 사는 사람들은 풍계리에서 내려오는 식수를 마시고 있어 의심되는 부분"이라며 "좀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통일부 차원의 조사가 향후 실시됐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보고서는 풍계리 핵실험장 인근 8개 행정구역을 피폭 영향권으로 설정했다. 김책시·단천시 등 2개 시와 길주군·화대군·명간군·명천군·어랑군·백암군 등 6개 군으로, 이 지역 주민들은 약 108만명으로 추산된다. 방사성 물질의 영향을 받는 주민들을 50%로 가정하면 54만명, 25%로 기준을 낮춰도 27만명에 달한다는 지적이다. 핵실험장에 인접한 '정치범 수용소' 16호 관리소에 수감된 2만8700명(지난해 6월 기준 추정치)도 영향권에 들어간다.
핵실험장 주변 특산물…'밀수' 통해 주변국 확산
한국이 주목할 건 '특산물 밀수'를 통한 피폭 우려다. 방사성 물질에 노출된 지하수로 자란 농수산물 역시 오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칠보산'이라는 상품화를 거쳐 전세계로 유통된 송이버섯이 대표적이다. 칠보산은 핵실험장에서 53㎞(핵시설 사고 시 영향권은 반경 40㎞) 떨어져 있지만, 이 일대 주민들은 "풍계리 일대에서 송이를 많이 채취했고 통제구역이 된 뒤로는 주변 산에서 계속 땄다"고 증언했다. 핵실험장 주변 송이까지 '칠보산 송이'로 둔갑했을 가능성도 충분한 셈이다.
북한 당국은 과거부터 이런 특산물을 외화 조달수단으로 활용해 왔지만, 해외로 유통한 품목과 규모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선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무관세 혜택까지 적용되며 인기를 끌었고, 2006년 1차 핵실험 뒤 중국과 일본이 수입을 중단했을 때도 북한산 농수산물 유통을 계속 허용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천안함 폭침사건을 계기로 5·24 조치가 이뤄지며 반입이 금지됐지만, 여전히 보따리상을 통해 중국산으로 위장된 북한산 특산물이 계속 수입되고 있다.
정부는 2015년 중국산으로 둔갑해 밀수된 북한산 말린 능이버섯에서 기준치(100㏃/㎏) 9배 이상(981㏃/㎏)의 방사성 세슘 동위원소가 검출됐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는 핵 분열 시 발생하는 물질로 핵실험 연관성이 충분했지만, 정부는 끝내 버섯의 원산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후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8년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받아 온 송이버섯 2t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걸 방사능 검사도 없이 이산가족 고령자 4000여 명에게 인당 500g씩 선물로 뿌렸기 때문이다.
'피폭 조사' 쉬쉬하는 정부…"즉각적 구제 나서야"
풍계리 핵실험장의 방사성 물질 유출 위험에 대한 조사와 길주군 출신 탈북민을 위한 피폭 검사를 처음 시작한 건 정부가 아닌 탈북민 중심의 민간 연구단체였다. 탈북민 최초로 도쿄대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서 샌드연구소를 설립한 최경희 대표는 길주군 출신들이 이상증세를 호소하는 점을 포착, 2016년 7월부터 북한의 1~3차 핵실험 이후 수년간 길주군에 거주했던 탈북민 총 23명을 심층 조사했다. 그 결과, 원인 모를 두통과 체중 감소, 감각기능 저하 등 신체 이상을 호소하고 있다는 게 밝혀졌다,
이후 통일부와 한국원자력의학원은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7~2018년 길주군 일대 출신 탈북민을 대상으로 방사선 피폭 검사를 실시한 바 있다. 다만 피검자 수는 2017년 30명, 2018년 10명으로 40명에 불과했다. 특히 이 가운데 20%를 상회하는 9명이 우려 수준의 염색체 이상을 보였지만, 북한의 반발을 의식한 듯 공론화에 미온적이었다는 게 보고서의 지적이다. 당시 통일부가 발표할 예정이던 검사 결과가 '백브리핑'으로 전환되고, 자료 제공 없이 구두 설명으로 끝났다는 점도 꼬집었다.
결국 후속 검사는 중단됐고, 현재까지 재개되지 않고 있다.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법률분석관은 "정부는 지금이라도 2006년 이후 풍계리 인근 8개 시·군에서 거주했던 탈북민 881명 중 희망자 전원을 대상으로 피폭 검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며 "피폭 증세를 보이는 탈북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상대로 즉각적이고 효과적이면서도 철저한 조사를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은 남한과 북한, 미국, 영국, 캐나다 등 5개국 출신 인권운동가와 연구자들이 2014년 서울에 설립한 인권 조사기록 단체다. 무력분쟁이나 독재 체제로부터 전환 중이거나, 아직 전환이 이뤄지지 않은 사회에서의 대규모 인권침해를 다루고,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목표로 한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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