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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영광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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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영광의 깃발 [이미지출처=영화 '영광의 깃발(Glory)'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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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1989년작 '영광의 깃발'은 미국 최초 흑인 보병 부대인 '매사추세츠 54연대'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들은 비록 전투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지만 이들이 흘린 피를 바탕으로 흑인 민권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애초 54연대는 매우 어렵게 탄생한 부대였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흑인들은 북군 편에서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고 싶었지만 북군 지휘관들도 남군 못지 않게 뼛속까지 인종 차별주의로 무장한 인물들이었다. 흑인 노예들에게 총을 쥐여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퍼져 나간 우생학이 신봉되던 시기라 군인들은 물론 많은 학자까지도 지능이 낮고 열등한 생물인 흑인은 병사로 쓸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던 시대였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1861년 남북전쟁 발발 이후부터 흑인의 입대를 허용했다. 하지만 어떤 주도 흑인 부대를 양성할 생각조차 안했다. 전쟁이 터진 지 3년이 지난 1863년 3월에서야 매사추세츠주에서 미국 사상 최초의 흑인 부대인 54연대를 발족했다. 노예 해방론자인 로버트 굴드 쇼 대령의 지휘하에 1000여명의 흑인 지원자가 입대해 편성됐다.


그러나 북군에서는 이들을 전선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총이나 군화, 군복 등 기본적인 보급품도 제대로 주지 않은 데다 이전부터 흑인 노예들에게 배정하던 후방 수송 업무만 맡길 뿐이었다. 남군에서 흑인 병사는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모두 처형한다면서 흑인 병사들의 안전이 염려된다는 핑계를 댔다.


그럼에도 54연대가 끊임없이 전선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북군에서는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리던 와그너 요새에 돌격, 요새를 탈환하라는 출격 지시를 내린다. 이 작전은 자살을 강요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흑인 병사들은 누구도 물러서지 않고 전선으로 향했다. 이들은 자기 목숨을 내놓더라도 흑인들의 노예 해방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54연대는 예상대로 전투 직후 지휘관인 쇼 대령을 포함해 병력의 40% 이상이 즉사하며 참패했다. 하지만 다수가 희생됐음에도 끝까지 군기를 잃지 않았으며 탈영병도 없었다. 북군에서는 흑인 병사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게 됐고 이후 전쟁이 끝나는 1865년까지 전체 병력의 10% 정도인 18만명 이상의 흑인들이 복무하게 됐다.



흑인들이 노예에서 미국의 정식 국민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때부터였다. 이후 미군이 참전한 모든 전장에서 흑인 병사들은 전체 병사 중 20~30%를 차지하는 주 전력이 됐다. 미국 내 흑인 인구 비율인 12%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었다. 흑인들의 인권은 폭력과 약탈이 아닌, 전장의 피와 땀, 희생 속에서 신장돼왔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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