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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곽공(郭公)처럼/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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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람이여

당신 당신이 지나간 자리에 생긴 구멍 구멍이 달처럼 커지면 커지고 또 커지면 커지다가 터져 버리면 매일 또 매일 그 구멍을 가득 가득 채우고 흘러 흘러 넘치고 넘쳐 내 몸의 틈이란 틈 틈마다 틈틈마다 스며든 내가 슬퍼하지 않도록 짙고 짙은 맑고 맑은 새봄 새봄 오후의 꽃나무 나무 나무 나무라는 그늘 아래 거느린 느린 늘어뜨린 향기보다 깊게 파고드는 체취 체취 체취를 끊김 없이 깊게 깊게 더 깊게 나의 흉중에 깊게 불어넣어 주세요


나의 힘이 되는 사람이여

나를 뿌리쳐 주세요 더럽다고 말해 주세요 매서운 말끝에 당신은 왜 나의 가슴을 부여잡나요 걷고 걸어 귀가하는 동안 어둠은 짙어졌는데 밉기도 해라 따스한 그 몸을 맘대로 다루어도 나는 기쁘지 않아요 아직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증거를 몸에 새기지 못했어요 너는 내 것이라는 화인이라도 받겠어요 당신이 나를 기다림에 묶어 두었어요


붉게 이글거리는 나의 사람이여

외롭고 힘없어 힘없어 말없이 우는 나를 당신 당신이 세게 거세게 더 세게 안는다면 안아 준다면 안으로 삽입한다면 나는 영원히 영원히 당신의 더운 품 더 운 얼굴 파고드는 흘러내리는 포옹과 눈물 포기한 옹을 사멸 가까워진 옹을 옹곽에 넣듯이 겁 많은 새가 둥지에 들어가듯이 몰래 몰래 몰래한 사랑 알로 알로 돌아가겠어요 나뭇잎 가지 가지 넝쿨 거친 잠자리 잠자리 가시에 가시에 내 가슴팍 쓸려도 사포 같은 바람의 혀에 긁혀도 긁혀도 나는 당신의 둥지 속에서 잠들고 깨는 어린 새 버려진 새가 되어 당신 품을 품을 파겠어요 나를 묻고 메우겠어요



[오후 한 詩] 곽공(郭公)처럼/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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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공’은 뻐꾸기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는다. “버려진 새”는 따라서 새끼 뻐꾸기다. 가련하구나, “어린 새”여. 그런데 이 시를 읽다 보면 한용운도 생각나고 더불어 김소월도 떠오른다. 한용운은 당연히 시의 내적 구조 때문이고 김소월은 명백히 리듬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 적힌 ‘당신’은 ‘가짜 어미새’이고, 리듬은 변형되고 분열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전통을 잇는 일은 반복이나 모사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훔치는 것에 불과하다. 전통은 부정과 갱신 속에서 벼려지고 부활하는 미래다. 이 시처럼 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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