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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도시이야기]목동, 말먹이던 목초지에서 '버블세븐'이 된 교육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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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도시이야기]목동, 말먹이던 목초지에서 '버블세븐'이 된 교육특구 서울 목동 일대 아파트 단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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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현재는 서울 서부의 강남, 이른바 '버블세븐'지역으로 꼽히는 양천구 목동은 원래 수풀이 많은 목초지였다. 말을 방목하는 목장이 많은 동네라 해 목동(牧童)이라 불리던 것이 조선시대에 한자표기가 바뀌면서 오늘날의 목동(木洞)이 됐다.

1970년대부터 상전벽해한 강남3구 지역과 비슷하게 목동도 상습침수구역으로 주로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모래땅이었다. 그러다보니 작은 마을단위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으며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월촌리에 속했다. 월촌리는 오늘날 목동 용왕산을 중심으로 생겨났던 자연촌락으로 순 우리말로는 '달거리 마을'이라 불렸다.


달거리 마을은 용왕산에서 떠오른 달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아직도 새해맞이를 비롯한 양천구의 각종 축제가 여기서 열린다. 이 달거리 마을은 안양천변을 중심으로 안쪽으로 들어간 마을은 안달거리, 바깥쪽에 있던 마을은 바깥달거리라 불렸다. 오늘날 용왕산 북쪽의 지역을 의미한다.

워낙 작았던 마을이라 특별한 문화재는 전해지는 것이 없고 현재 목동 정목어린이공원 쪽에 위치한 느티나무 하나가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지표역할을 하고 있다. 160살 된 이 나무는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고사됐다가 다시 소생해 잘 자라고 있다.


이처럼 시대의 주역에서 벗어나 별 볼일 없던 달거리 마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농경지가 조성되며 점점 변화를 겪게 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안양천에 제방공사가 시작돼 상습침수지구에서 벗어나 완전히 뭍으로 올라오게 됐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행정구역 개편이 시작돼 1963년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서울의 일부가 됐다. 1970년에는 영등포구 염창동에 속했다가 1975년 염창동에서 분리됐다. 1977년에 영등포구에서 강서구로 구역이 바뀌었다가 1988년 양천구 관할이 돼 오늘에 이르렀다.


목동이 영등포구에 속해있었던 1960~1970년대만 해도 판자촌과 부랑자들이 모이던 어두운 동네였다. 바로 옆에 신정동에서 아이들이 '깡패 동네'라고 부를 정도로 치안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한강개발사업을 타고 대규모 주택단지로 변모, 1983년에 목동지구 신시가지 개발 계획이 발표되고 5년 뒤 신시가지가 완성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개발지구로 탈바꿈한다.


오늘날에는 목동종합경기장, 서울국제우체국, 방송사인 SBS, 현대백화점 목동점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섰으며 목동 하이페리온, 트라팰리스와 같은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강남 못지않은 부촌 중 하나로 떠올랐다. 여기에 '강남8학군'과 맞먹는 교육특구로 명성을 얻으면서 서울 부동산 가격을 좌우하는 양대 축으로 떠올랐다.


최근엔 목동신시가지 아파트들에 대한 재건축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재건축 연한이 40년에서 30년으로 단축되면서 신시가지 아파트들이 일제히 재건축 사업 대상에 들어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재건축 연한에 도달한 1~6단지를 비롯해 나머지 7~14단지도 2018년부터 재건축 사업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따라 목동의 재건축 바람은 한동안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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