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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유니크한 계단 / 김산

시계아이콘읽는 시간55초

계단은 한 계단 두 계단 단계 단계 손금처럼 발금처럼. 검정 바나나처럼 물컹물컹 시들시들해지고. 구불구불 구차해지고. 당신은 한쪽 눈을 감고 한 손을 높이 쳐든 깨금발 소년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가위 바위 보. 감자에 입이 나고 싹이 나고 계단의 귀퉁이에서 돋아나는 수증기 혹은 입김처럼. 계단은 나선형으로 비틀비틀 비척비척. 주정뱅이 삼촌처럼 주저앉아 코르덴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그렇지만 계단은 빨갛고 노랗고 새파랗게 둥둥 떠 있고. 다시, 한 계단 두 계단 아장아장 걷고 뛰고 허방에 움푹 빠지고. 당신은 허우적거리고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계단의 무릎이 삐걱삐걱 소리치며 계단 살려 계단 살려. 계단에는 나무가 살고 나무탱크가 살고 나무탱크구름이 살고 나무탱크구름버스가 부릉부릉. 우리는 계단을 타고 올라 우리의 배후를 도모하고. 계단 위의 계단을 밟은 총과 칼과 물과 숨이 일제히 일어서서 계단을 천착하고 상정하고 정언하고. 계단은 견고하고 계단은 좀처럼 부서지지 않고. 우리가 쌓아 올린 계단은 오늘도 우리를 긍휼히 증거하고.


[오후 한詩] 유니크한 계단 / 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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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 참 재미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우리를 긍휼"하는 듯하다. 이 시의 재미는 일단 읽는 맛에 있다. "계단은 한 계단 두 계단 단계 단계 손금처럼 발금처럼"이라는 첫마디를 들릴 듯 말 듯 소리 내어 읽어 보라. 희한하게도 구불텅구불텅거리면서도 또한 쭉 연이어 읽히지 않는가. 마침표로 구분해 둔 그다음 마디들도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각각의 마디들 안과 마디와 마디 사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여백이 만만치 않게 깊고 넓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첫마디에 등장하는 명사들만 해도 그렇다. '계단-계단-계단', '단계-단계', '손금-발금'. 물론 '계단'과 '단계'는 의미상 어느 정도 가깝지만, '계단'과 '손금', '단계'와 '발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그 마디를 읽는 데 별다른 인식상의 저항이나 지연이 없다. 리듬 때문이다. 이 시의 리듬은 주로 반복에 의해 형성되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첫 번째 마디와 두 번째 마디 간의 심연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은 '-처럼'이며, 두 번째 마디와 세 번째 마디는 동일한 구문을 통해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이 시는 한마디로 공교하게 "쌓아 올린 계단"이다. 그런데 이 "유니크한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계단을 이룬 것이 실은 "허방"과 비명이었다는 사실에 아연해진다.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 자신이고 우리의 삶이니.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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