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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풀/정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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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풀/정우신 오후한시. 풀/정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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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것은 슬픈가.
차가운 것은 움직이지 않는가.

발목은 눈보라와 함께 증발해버린 청춘, 다리를 절룩이며 파이프를 옮겼다. 눈을 쓸고 뒤를 돌아보면 다시 눈 속에 파묻힌 다리, 자라고 있을까.


달팽이가, 어느 날 아침 운동화 앞으로 갑자기 떨어진 달팽이가 레일 위를 기어가고 있다.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을까. 다락방에서 반찬을 몰래 집어 먹다 잠든 소년의 꿈속으로. 덧댄 금속이 닳아서 살을 드러내는 현실의 기분으로.
월급을 전부 부쳤다. 온종일 걸었다. 산책을 하는 신의 풍경, 움직이는 생물이 없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없다. 공장으로 돌아와 무릎 크기의 눈덩이를 몇 개 만들다가 잠에 든다.

(중략)


밤이, 어느 작은 마을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밤이 등 위에 정적을 올려놓고 천천히 기어간다. 플랫폼으로. 플랫폼으로. 나를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창밖으로 내리는 눈발의 패턴이 바뀐다.


간혹 달팽이 위로 바퀴가 지나가면 슬프다고 말했다.


(후략)


■ 풀잎 위에 있어야 할 달팽이가 뜨거운 레일 위에 있다. 지금 청년들이 그렇다. 한창 푸른 꿈을 꾸고 이성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도 하고 아담하나마 달콤한 신혼집도 장만하고 그래야 할 청년들이 저 무시무시하게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진 레일 위에 있다. 그런 그들을 두고 기성세대는 그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없다"고 나무라기만 한다. 그러다 "간혹 달팽이 위로 바퀴가 지나가면 슬프다고 말"하고 그만이다. 그래선 안 된다. 정말이지 안 된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전부 부"치고 하염없이 "온종일" 이리저리 걷고 걸었던 우리가 바로 저들이지 않은가. 더 이상은 청년들이 자기 자신을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게 해서는 안 된다. 연민 때문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의무이자 현재와 미래가 걸린 문제라서 그렇다. 참고로 정우신은 올해 등단한 서른셋의 신인 시인이다.


채상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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