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초동여담]모국어 번역기

시계아이콘읽는 시간58초

[초동여담]모국어 번역기
AD

"아버니므를 마니 조느경하무니다. 그러나 가조꾸 문제와 경영은 벼르개이무니다."


이 무슨 '기싱꿍꼬또' 같은 소리냐며 머리를 갸웃거릴 독자들을 위해 가벼이 번역기를 돌려보시겠다.

"아버님을 많이 존경합니다. 그러나 가족과 경영은 별개입니다."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치열한 '롯데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얼마 전 남긴 말이다. 어눌한 발음으로 그는 한국 기자들 앞에 섰다. 신동빈에게 한국어는 제 2외국어다. 일본어식 한국어 발음은 어색했고 네티즌들은 힐난했지만 '롯데가 한국기업'이라는 그의 강변에 대한 떡밥치고는 효과적이었다. 너무 말끔하지 않은 발음이어서 오히려 드라마틱했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형 신동주에게 날리는 한방이기도 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라고 했지만 이 순간 신동빈에게 한국어는 권력이었다.

언어는 때론 지능을 담는다. 미국 조지타운 대학의 메디컬센터 연구팀은 최근 언어와 지능의 상관관계를 추적해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했다. 두뇌 크기를 분석한 연구팀은 외국어를 구사하는 성인들의 전두엽과 두정엽 부위의 대뇌피질이 모국어만 사용하는 성인들보다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두엽과 두정엽은 집중력, 억제력, 단기 기억력 등을 관장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집행통제'라고 하는데 정보를 처리하고 학습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연구팀은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외국어도 잘하는 사람이 머리도 좋다.' 조기 외국어 교육에 심취한 우리들에게는 흥미로운 연구이지만 오독하지 마시라. 다시 말하지만 외국어'만'이 아니라 외국어'도'다. '모국어의 사고력이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는 언어학의 기본이다.


일본 말이라고는 벤또나 다꾸앙 정도를 겨우 읊조리는 처지에 대뇌피질이 어쩌니 신동빈 발음이 저쩌니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우리는 과연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냐고. 서툰 외국어보다 모국어가 더 어설프지 않냐고.


멀리 갈 것도 없다. 여당과 야당이 그렇고 경영자와 노조도 마찬가지다. 같은 말을 쓰는데도 저들의 대화는 공허하고 무기력하다. 말은 하되 소통은 마비됐다. 직장에서도 영혼없는 지시와 복명복창이 교차하고 가정에서는 라면 끓이는 시간보다도 짧은 부모 자식 간 대화가 서글픈 정적을 드리운다. 하기야 권력의 정점에 선 우리 대통령도 간혹 번역기가 필요한 모국어를 구사하지 않던가. 그러니 신동빈의 '하무니다' 화법을 희화화할 것도 없다. 대뇌피질의 부피를 부러워할 이유도 없다. 그저 우리말부터 제대로 쓰면 그뿐이다. 모국어 번역기 없이 말이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