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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붓질의 감각'…'회화'만의 열린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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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붓질의 감각'…'회화'만의 열린 해석 리넷 이아돔-보아케, '목숨을 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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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붓질의 감각'…'회화'만의 열린 해석 박진아, '여름 촬영'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현대미술은 경계가 모호해질 만큼 장르가 다양하다. 사진의 발달과 더불어 디지털, 영상, 설치 등의 매체가 전시장을 가득 메운 모습은 이젠 익숙한 일이다. 하지만 최초의 미술 행위인 '회화'는 가치가 바래지 않는다. 도리어 이미지 홍수 시대에 '회화'는 그 깊이를 더해 재조명 받고 있다. 독일, 영국, 미국을 비롯 국내에도 최근 몇 년 간 열린 대규모 회화전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면 '회화'란 과연 언제부터 탄생한 예술행위일까? 로마 시대의 군인이자 박물학자였던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저서 '박물지'(77년)에서 "코린토스 지역의 부타데스라는 도공의 딸이 곧 떠나갈 연인의 그림자를 벽에 따라 그린 것이 인류 최초의 그림"이라 기록했다. 이 전설은 회화를 단순한 '재현'을 넘어 폭넓은 '감각'의 행위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회화와 그림자의 관계에서는 순수 우리말인 '그림'과 '그리다' 그리고 '그림자'가 그 어원을 같이 하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지난 주 개최된 '그림/그림자-오늘의 회화'전은 이와 맥락을 함께 한다. '회화의 기원'을 되새기며, '그리기'의 행위로 드러나는 회화의 표현영역의 확장에 초점에 맞췄다. 30~40대 중견이상의 커리어를 갖춘 국내외 작가 열두 명이 전통적인 '붓질'의 언어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작품들이 나왔다.


전시는 먼저 '내재화된 이미지 세계'라는 주제로 시작된다. 백현진 작가는 가수, 감독,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이로, 다양한 예술적 관심을 실험하는 방식 중 하나로 그림을 그린다. 그는 과거의 거장들의 이미지들을 도구처럼 차용해 붓질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만화적인 인물의 모습과 추상적인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진 감각적인 신작들을 이번 전시에 내놨다. 미국 작가 데이나 슈츠 역시 과거의 미술사조의 여러 표현 방식들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인상주의부터 신표현주의까지 미술사의 거의 모든 시대의 테크닉이 혼재돼 있는 작품 속에는 엉뚱하고 새로운 표현들이 눈길을 끈다. 브라이언 캘빈은 LA 특유의 팝초상화를 제작한다. 대부분 상상으로 만든 인물화로,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이다. 영국 여성 작가 리넷 이아돔-보아케 역시 허구적 인물들을 그림 속에 배치했다. 과거 대가들의 작품 속 백인 인물을 흑인들로 대치해, 인종과 정체성의 성찰을 주제로 한다. 미국 작가 헤르난바스는 이 시대 떠오르는 현대미술 작가로, 요정과 밤, 문학 속 장면들을 꿈처럼 캔버스로 담아낸다. 신작으로 내놓은 작품에는 숲속 야경 꽃들이 흐드러진 배경 속 댄디한 소년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시대 '붓질의 감각'…'회화'만의 열린 해석 데이나 슈츠, '싱어송 라이터'


이 시대 '붓질의 감각'…'회화'만의 열린 해석 리송송, '장군'


이어 두 번째 주제인 '시간과 기억의 도구'라는 장으로 넘어간다. 박진아는 영화촬영 현장이나 미술관 설치과정을 촬영한 스냅샷을 결합해 하나의 화면에 담아낸다. 최근 공항 안의 풍경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전시하며 주목을 받은 바 있는 작가는 정교하고 섬세한 화면의 레이어들로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을 시각화한다. 폴란드 작가 빌헬름 사스날 역시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을 새로운 방식의 회화로 표현하는 화가다. 그림을 '삶의 기록'이라 여기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회색빛 배경과 인물, 파란 웅덩이와 그 속에 부유한 물체를 대비한 작품을 선보였다. 중국 작가 리송송은 일단 분할된 캔버스를 붙인 하나의 작품 속에 역사적 맥락과 연계된 인물을 흐릿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쉽게 포착하기 힘든 인간의 기억과 닮아 있다. 루마니아 출생 셰르반 사부의 작품에는 빛바랜 공산주의 체제의 거대한 건축물들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하지만 중심엔 카드놀이를 하는 등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밝은 톤으로 구성된다.


마지막 '스틸 라이프'라는 주제의 장에는 영국 작가 질리언 카네기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전통적인 회화의 소재인 정물, 풍경 등을 그리지만 그의 작품은 독특한 면이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검은 직사각형의 추상화지만 가까이서는 숲속의 모습이 선명하다. 미국 작가 조세핀 할보슨은 자택에 있는 창문을 그대로 캔버스에 재현하는 등 일상적이고 오래된 사물을 표현한다. 사물을 바라봤던 상황, 분위기, 촉각이 담긴 그의 그림에는 회화이면서도 하나의 오브제처럼 느껴지게 하는 힘이 있다.


조나영 큐레이터는 "열두 명의 작가가 서로 다른 주제, 스타일, 문화적 맥락으로 작업하면서도 현대회화의 맥락 안에서 붓과 물감, 캔버스로 이뤄지는 가장 전통적인 미술 언어로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며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붓질의 감각을 통해 회화만이 줄 수 있는 열린 해석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회화의 매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중구 삼성미술관 플라토. 오는 6월 7일까지. 1577-7595.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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