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의 신작...마이클 키튼의 화려한 재기작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아마 그 시작은 레이먼드 카버가 냅킨에 적어 준 메모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학창시절 우연히 자신의 연극을 본 레이먼드 카버가 "진실된 연기, 고맙다"라는 메시지를 건넨 것을 계기로,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 '버드맨' 시리즈의 주인공을 맡아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됐던 그 순간들은 그의 배우 인생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속편 출연을 거절한 뒤부터 리건은 날개잃은 버드맨처럼 끝없이 추락했다. 그 많던 재산을 탕진했고, 아내와는 갈라섰으며, 딸과의 사이는 멀어졌고, 대중들에겐 한물 간 배우 취급을 받았다.
다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던 리건은 헐리우드가 아닌 브로드웨이의 문을 두드린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진정한 '배우'로서의 가치를 되찾기 위해서다. 리건이 주연, 연출, 제작까지 도맡아 무대에 올릴 작품은 하필이면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자신이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안겨다 준 그 레이먼드 카버 말이다. 천재 작가의 대표작을 각색하는 일은 상당한 위험 부담이 따른다. "왜 나는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지. 난 네 맘에 들기 위해 내가 아닌 다른 남자가 되기를 항상 꿈꿨어"라는 작품 속 대사는 리건의 실제 상황과도 맞물린다.
영화는 리건이 이 새 연극을 올리는 우여곡절의 과정을 다룬다. 개막일을 코앞에 두고 뜻밖의 사고로 배우 한 명이 부상을 당하고, 그의 대타로 온 조연 배우 마이크(에드워드 노튼)는 제멋대로이고, 신경과민한 딸(에마 스톤)은 독설을 퍼붓고, 급기야 연극계를 좌지우지하는 한 평론가는 악평을 쓸 것이란 예고로 그의 정신을 사납게 만든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마다 리건에겐'버드맨'의 환영과 환청이 찾아온다. 비행기가 태풍을 만난 위기의 순간에서도 다음 날 신문에 자신이 아니라 앞자리에 앉은 조지 클루니의 사진이 실리게 될 것을 걱정하는 리건, 그는 과연 연극을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은 아카데미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자학적인' 풍자 영화다다. 할리우드가 가지고 있는 허위와 속물, 미디어와 평단의 허풍과 왜곡, 대중들의 속성 등에 대해 유머러스하면서도 예리한 통찰을 선보인다. 대사 한 마디, 장면 하나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그럼에도 원-신, 원-테이크처럼 (보이도록) 촬영된 이 영화가 주는 속도감과 긴장감은 관객들을 미로처럼 얽힌 극장과 브로드웨이 뒷골목으로 정신없이 몰아넣는다.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외에 촬영상도 당연히 받았어야 할 몫이다. 불규칙적이면서도 신경을 긁는 안토니오 산체스의 드럼 연주는 리건이 받는 심리적 중압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영화의 특성은 캐스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여년 전 '배트맨' 시리즈에 출연해 전성기를 누린 이후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마이클 키튼의 실제 이야기는 리건의 그것과 판박이다. 비록 본인은 이 역할에 공감하지 못했다며 부인했지만 말이다. 무대 위의 모습과 현실에서의 생활이 전혀 다른 '마이크'를 연기한 에드워드 노튼도 실제 본인의 캐릭터와 싱크로율이 높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문화를 말살하는" 곳으로 유명한 이 할리우드에서 이토록 지적이고 번득이는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큰 아이러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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