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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타이거 朴 차관', 필리핀 농부로 살기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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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사람들 마음의 문 열었을 때가 가장 보람된다"…필리핀 선교활동, 농사짓기로 제2의 인생

90년대 '타이거 朴 차관', 필리핀 농부로 살기 10년 박운서 전 차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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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차로 넉넉잡아 세 시간, 바탕가스 항구에서 다시 배를 타고 타고 한 시간 가량 가면 민도르 섬이 나온다. 마닐라에서 약 140km 떨어진 이곳은 필리핀에서 7번째로 큰 섬이다. 여기서 다시 비포장도로를 차로 세 시간, 걸어서 세 시간을 가다 보면 북부 산간지역에 망얀족(필리핀 원주민) 마을이 나타난다. 오지 중의 오지라고 불리는 민도르 섬 내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이 마을에는 망얀족들이 '박 할아버지(Elder Park)'라고 부르는 박운서(75) 전 통상산업부 차관이 살고 있다.

인터넷도, 휴대폰 연결도 안되는 상황에서 어렵사리 박 전 차관을 전화로 만났다. 건강은 어떠냐는 질문에 "원래 한국에서는 65kg을 유지했는데, 여기에 온 이후로는 몸무게가 45kg까지 내려갔다 지금은 다시 57kg까지 올라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 날씨가 워낙 덥기 때문에 물을 많이 먹고 땀을 많이 흘린다. 낮에 땡볕에 산속으로 많이 다녀서 그런지 살이 더는 안찌지만, 펄펄 날아다니고 있다."


박운서 전 차관의 경력은 화려하다. 1968년 행정고시를 통과해 뉴욕총영사관 경제협력국 영사,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을 거쳐 1994~95년에는 제1대 통상산업부 차관을 역임한 정통 경제통이다. 당시 주위 사람들은 화끈한 추진력과 기백을 갖춘 그에게 '타이거 박'이라는 별명을 붙여 불렀다.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인 1996년부터는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사장, (주)LG상사 대표이사 부회장, 데이콤 및 파워콤 회장 등을 맡았다. '죽어가는 기업도 살리는 기업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은퇴 무렵인 2000년대 중반, 돌연 선교활동을 위해 필리핀행을 선언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다 늦게 거기 가서 왜 고생하냐'고 친구들이 다 말렸다. 하지만 돈 많고, 좋은 음식에 좋은 차 타는 생활은 몸이 편안한 생활일 뿐이다. 여기서는 못 먹고, 가진 것도 없고, 육신적으로 어려운 환경이지만 마음은 즐겁고 편안하다. 아쉬운 게 하나도 없다. 육신이냐 마음이냐,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 그 차이다. 여기선 세속의 가치관도 아무짝에 쓸모없다. 나 역시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까지 공부를 마쳤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구구단' 하나밖에 없다. 아마 한국에 계속 있었으면 골프나 치고 다니면서 빌빌거리고 있었을 것이다.(웃음)"


90년대 '타이거 朴 차관', 필리핀 농부로 살기 10년 박운서 전 차관과 망얀족 사람들


2005년 2월 필리핀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넓은 땅을 사서 쌀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혼자서 도저히 해낼 수가 없어 1년 동안 아들을 불러다가 일을 시키기도 했다. 농사의 '농'자도 몰라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지만, 한국과 필리핀의 장점을 딴 경작방식으로 2007년부터는 흑자를 낼 수 있었다. 현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킬 수 있는 예배당도 건립했다. 무엇보다 "신발신고, 바지입은 외국인들을 악령들린 귀신이라고 여기는" 망얀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전직 차관 출신이 오지 생활을 자처했다는 전무후무한 소식에 KBS나 MBC 등 방송사에서도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절대로 뭘 가져다주는 일이 없는 망얀족 사람들이 최근에는 바나나를 따와서 주기도 하고, 닭도 잡아서 내오기도 하더라.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기가 먹을 고구마를 선뜻 줄 때 가장 보람된다"고 말했다. 망얀족들은 필리핀 공용어인 따갈로그어도 쓰지 않기 때문에 '박 할아버지'와 원주민들은 손짓 몸짓으로 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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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박운서 전 차관은 은퇴 후 생활을 고민하고 있는 직장인들에게 "남에게 주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해 달려왔다면 한번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보라는 것이다. "내 동기 중에는 은퇴 후 대학 총장으로도 갔다가 국회의원도 됐다가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과연 이 분들이 노후 인생을 얼마나 만족스럽게 보내고 있을까? 내가 보기엔 항상 일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못사는 사람들, 약한 사람들, 천대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부터 시작하면 거기서 큰 즐거움과 기쁨이 온다. '진짜 그럴까?'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나를 믿고 한번 실천해봐라."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다는 소식도 한참 후에 들었을 만큼 한국 소식에는 감감무소식이지만, '경제통'으로서 한국 경제를 걱정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지인들에게 농담삼아 즐겨 얘기하는 것이 한중일 경제협력기구다. 영국과 프랑스가 유로터널을 뚫은 것과 같이 삼국도 그런 시도를 해볼 수 있지 않겠나. 또 내부적으로는 잘하는 사람은 칭찬하고, 못하는 사람은 격려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 우리는 잘하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못하는 사람을 동정만 하고 있진 않나. 그런 속성부터 바꿔야 한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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