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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동침 약속했던 그 매화가 피었다(32)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29초

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32)

[千日野話]동침 약속했던 그 매화가 피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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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웃으며 말했다.
"아, 산해라 하면, 윤원형이 벌써 사윗감으로 탐냈다 하는...?"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 아이도 포함시켜 봅시다. 봄날 좋은 날을 잡아, 명명유회(命名遊會)를 갖기로 하시지요."
이지함이 말했다.
"멋진 생각이십니다. 불러주실 동안, 단양의 비경을 돋을새길 진명(珍名)을 저도 고심하여 보겠습니다."
일행은 유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란 나비 한 마리가 흰 매화 위에 앉아있었다. 비단부채 같은 날개를 폈다 세웠다 하는 모양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두향은 가만히 다가가 나비를 잡으려 했다. 나비는 경련하듯 가볍게 날갯짓을 하며 두어 꽃송이를 지나 다시 앉는다. 두향은 손가락을 모아 다시 나비에게로 향했다. 놀라 퍼득이며 살짝살짝 달아나는 파란 날개를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큰 벼랑에 서 있다. 나비는 벼랑 중턱에 있는 가지가 늘어진 꽃 위로 다시 날아가 앉았다. 아름답게 백매를 피운 도수매(倒垂梅)였다. 두향도 나비를 따라 아래로 뛰어내리려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어 멈췄다. 마음은 멈췄는데 몸은 멈추지 못하고 벼랑 아래로 흘러내린다. 급한 김에 매화 가지를 붙잡는데 나비가 이마에 와 앉는다.


그때 도수매의 뿌리가 뽑히면서 낭떠러지로 몸이 그대로 나무둥치와 함께 떨어져 내린다. 추락하면서도 앉아 있는 나비의 가는 다리가 꼬물거리면서 눈꺼풀 위로 움직이는 걸 느낀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현기증이 났다. 천지가 아득해지는 가운데 두향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나비는 없었다. 지창(紙窓)에 새벽 기운이 부옇게 모여들고 있었다. 밖에선 까치의 퍼득이는 날갯짓 소리, 두어 마리가 번갈아 우지짖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서둘러 옷을 걸치고, 겨우내 짚을 둘러쳐놓은 난실(暖室)로 들어가보았다. 아아. 도수매가 딱 한 송이 흰 꽃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퇴계 나으리가 말한 그날이 오늘이었다.

賴是我從花下看 昴頭一一見心來(뇌시아종화하간 묘두일일견심래)의 꽃. "이리하여 내가 몸을 낮춰 꽃밑에서 올려다보니 / 고개를 치켜든 꽃머리 하나하나마다 마음 다가오는 게 보이도다"라고 퇴계와 두향이 뜻을 모아 읊었던 시 '도수매'. 그 도수매가 피었다.


도수매는 보통 수양매(垂楊梅) 혹은 능수매라고 부른다. 잔가지가 능수버들처럼 늘어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제의 외도나 소록도 수양매가 유명하지만 전국의 농원에서 백매와 홍매, 그리고 분홍매들을 고루 생산해내고 있다. 가지들이 모두 아래로 아래로 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꽃봉오리가 땅을 향해 핀 기이한 꽃, 그래서 사람이 제대로 꽃송이를 보려면 제 몸을 낮춰서 봐야 하는 꽃. 꽃은 감추는 아름다움을 지녔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을 얻는다. 가지 전체에 점점이 전등을 밝히듯 일제히 꽃을 피우는 모습이 아름다워, 가로수와 정원수로 많이 쓰이고 분재목으로도 인기가 높다. 이른 것은 2월에도 피지만 4월에 피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이 수양매를 도수매라고 부르는 이는 거의 없다. 이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이 땅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폐라 할 수 있는 천원짜리에 모셔져 있는 퇴계가 쓴 최고의 시 제목인 '도수매'는 그 자체가 힘 있는 브랜드가 될 수 있다. '거꾸로 드리운 매화'라는 의미도 생생하며 퇴계가 일생에 걸쳐 강조하고 실천한 경(敬ㆍ타인을 우러르는 마음)의 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그 자태 또한 무언의 스승이라 할 만하다.


이 매화를 퇴계 매화 혹은 도수매라고 부르고 그 역사적ㆍ정신적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건 단순한 관상화(觀賞花)의 가치를 훌쩍 넘어선다. 또 퇴계의 사상과 가르침을 복잡하고 근엄하게 가르치는 대신, 저 도수매 한 그루를 앞에 놓고 설명한다면 훨씬 알아듣기 쉽고 공부도 따분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두향과의 저 언약이 살짝 끼어든다면, 많은 학생들은 퇴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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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단양팔경을 정해볼까요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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