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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알기③]'전화기' 없이 못 사는 요즘…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48초

산업통상자원부는 우리나라 산업ㆍ기술ㆍ인물ㆍ역사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전자책(e-book) <흥미진진 경제다반사>를 발간했다. 이 전자책은 산업통상자원부 공식 블로그인 '경제다반사'에 게재된 6500여건의 콘텐츠 가운데 30건 만을 엄선해 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ㆍ흥미진진 신기술' 등 즐겁고 유익한 내용을 간추려 전한다.


[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 대한민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사랑 받는 상품들의 '처음' 모습은 어땠을까. 그 세 번째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 생활기기인 '전화기'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해 12월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유선전화 가입자 수는 1800만명,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5300만명으로 집계됐다. 인구수보다 많으니, 1인당 1개 이상의 전화기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단순한 통화 기능을 넘어 인터넷, MP3 플레이어, TV, 내비게이션 기능까지 수행하는 휴대폰은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불과 200년 전까지만 해도 전화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서울에 사는 사람이 부산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한다? 지금은 전화 버튼을 누르면 그만이지만 조선시대에는 편지를 써서 부산까지 직접 전달해야 했다.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 중국 톈진 유학생 상운에 의해서였다. 그가 그 해 3월에 귀국하면서 전화기와 전선 100m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험통화가 이때 이뤄진 것으로 추측된다. 전화기는 우리나라에 도입되기 전에도 '텔레폰'의 이름을 빌려 '다리풍(?釐風)' '덕율풍(德律風)' '어화통(語話筒)' 등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1893년 11월에는 지금의 세관인 총해관에 "일본 동경에서 구입해 들여오는 전화기와 전료(전화기 재료) 등을 면세하라"는 정부 공문이 내려진 적이 있는데, 이는 궁궐 안에 전용전화를 가설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자석식 전화기가 1896년 덕수궁 내부에 설치됐다. 이 전화는 주요 관아는 물론 인천까지 개통됐는데, 이 전화기 덕분에 생명을 구한 청년이 있었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국모의 원수 갚기에 나선 김구 선생은 일본 육군 중위를 살해해 사형선고를 받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종이 인천감옥에 직접 전화를 걸어 사형집행을 중지시킨 것. 놀랍게도 이날은 전화가 개통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개통이 조금만 늦었어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 알기③]'전화기' 없이 못 사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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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 전화가 설치되고 6년 뒤인 1902년 3월에는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는 공중전화가 서울과 인천 사이에 개설됐다. 당시 전화요금은 5분 통화에 50전이었고 대기자가 있을 경우 통화시간은 10분 이내로 제한됐다고 한다.


휴대폰 없이 한 시간을 버티기 힘든 요즘 세태와 달리 당시 백성들은 전화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일본에서 들여온 전화가 일제의 침략수단이라 여겼고, 심지어 가뭄이 드는 것까지 전화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통신 사업을 꾸준히 추진해 서울과 개성, 개성과 평양, 서울과 수원 등으로 통화권을 확대했다. 1905년 가입자 수가 80명으로 늘며 발전 추세를 보이던 전화 사업은 안타깝게도 그 해 4월 일본에 통신 사업권을 빼앗기며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우리나라의 통신 사업은 오랫동안 암흑기를 보냈다. 우리나라에서 국내 기술로 전화기를 처음 만든 곳은 금성이었다. 이 회사는 1961년 자동식 전화기 '금성1호'를 개발했지만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통신 사업은 선진국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었다.


1970년대 초반 전화기는 흔히 '흑통' '백통'으로 불렸다. 교환원을 거치는 수동식 전화는 '흑통', 교환원 없는 자동식 전화기는 '백통'으로 불리며 부자들만이 사용했다.


이렇듯 오랜 기간 발전이 더뎠던 우리나라의 전화 기술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다. 1987년 7월 전화 교환 방식이 자동식으로 바뀌며 교환원이 없는 전자 교환 시대가 열리자 한국의 전화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국내 보급되기 시작한 무선전화기는 전화기의 혁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선전화기에 비해 음질이 떨어지고 가격과 통화료도 비쌌지만 이동하면서 통화할 수 있다는 편리성 때문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무선전화기는 오늘날 한국이 세계 시장에 우뚝 서게 만든 휴대폰의 모태가 됐다.


아쉬운 점은 유선전화는 사양길에 접어든 상황이라는 것. 바빠진 현대인의 생활, 1인가구의 증가, 휴대전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유선전화는 점점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전화기는 12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유선전화의 자리를 세계 최고 품질의 휴대폰이 지키고 있으니, 유선전화의 뒷모습은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김혜원 기자 kimhy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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