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요즘 인천 유나이티드는 시쳇말로 잘 나간다.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3승3무1패(승점 12)로 리그 5위다. 당초 목표였던 상위 스플릿 진출은 물론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경쟁도 낙관해볼만한 기세다.
파죽지세 속에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돌아온 풍운아' 이천수와 3골 1도움을 올린 신인 이석현이다. 여기에 '봉길매직'의 수장 김봉길 감독을 더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간과된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베테랑 미드필더 김남일이다.
인천의 김남일은 대표팀이나 전남·수원 시절의 김남일과 사뭇 다르다. 예전엔 이탈리아 미드필더 젠나로 가투소와 닮아 있었다. 가투소만큼 공격에서도 재능을 발휘한건 아니지만, 저돌적인 자세와 강한 투쟁심만큼은 못지 않았다. 둘 다 '중원의 진공청소기'란 별명을 가졌던 점도 우연은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 예전같은 운동 능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왕성한 활동량과 적극적인 압박은 '젊은 피'이자 더블 볼란테 짝인 구본상의 몫으로 돌아갔다.
대신 절묘한 위치 선정으로 수비에 힘을 더한다. 김남일은 포백 라인 바로 위에서 수비의 방파제 역할을 맡는다.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움직임으로 상대 패스의 줄기를 막아선다. 상대가 중앙으로 치고 올라올 땐 순간적으로 수비에 합류해 파이브백과 같은 형태를 이루거나, 구본상과 함께 상대가 공격형 미드필더를 압박한다. 측면에선 풀백과 함께 농구의 더블팀처럼 공격수를 에워싸 재빠르게 볼을 뺏어낸다.
동시에 정확한 킥으로 공격에도 힘을 싣는다. 김남일의 패싱력은 수비능력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 실상 그는 K리그 클래식 전체에서도 수준급으로 꼽히는 전진 패스 능력을 갖추고 있다. 설기현도 "(김)남일이형은 공격수가 원하는 곳에 패스를 넣어줄 줄 안다"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울 정도다.
현재 인천 패스 축구의 두 축은 이석현과 김남일이다. 이석현은 짧은 패스와 스위칭 플레이로 공격 전개에 힘을 싣는다. 반면 김남일은 2선 깊숙한 곳에서 전방이나 측면을 향한 길고 정확한 롱패스를 찔러준다. 이는 특히 공수전환 상황에서 이천수·한교원·남준재 같은 발 빠른 측면 자원의 위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연스레 경기 템포 조절 역할까지 맡는다.
모든 면을 봤을 때 가투소 보다는 오히려 안드레아 피를로를 연상시키는 플레이 스타일이다. 김남일이 공수 전반에서 맹활약하는 덕분에 김봉길 감독의 축구도 더욱 힘을 받고 있다. 패스 플레이를 앞세운 공격과 단단한 수비가 조화를 이루기 때문.
마치 이탈리아가 피를로의 활약 속에 유로 2012 준우승을 차지했던 것처럼, 인천의 지금 상승세에는 김남일의 탁월한 활약이 뒷받침되고 있는 격이다. 스타일의 변화에도 여전한 존재감을 뽐내는 이유다.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낮춘다. 부상으로 결장했던 성남전(3-1 승)을 보며 "내가 없는데 더 잘하는걸 보니 그만 둬야 하나 싶다"라고 너스레를 떨고, 최근엔 "(설)기현이가 빨리 부상에서 돌아왔으면 좋겠다"라고 엄살을 피운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중심축 역할을 한다. 올 시즌 선수단 만장일치로 주장을 맡은 점만 봐도 그가 팀 전체의 든든한 버팀목임을 알 수 있다. 이석현은 "(김)남일이형과는 같이 뛰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이라며 "운동장에선 물론이고 평소에도 배울 점이 많은 선배"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플레이 스타일만큼이나 리더십도 변화가 생겼다는 점. 김남일은 학창시절과 프로에서는 물론 대표팀에서도 주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예전엔 말없는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장악했다. 반면 인천에서 '악역'은 부주장 박태민에게 돌아갔다.
대신 김남일은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행동이 더 중요"하다며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실천하고 있다. 철저한 자기 관리를 몸소 보여주는 것은 물론, 어린 선수들에게도 먼저 다가가 농담도 건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든다. 코칭 스태프와 선수단 사이 가교 역할도 맡으며 살림꾼 노릇을 한다. 이천수의 빠른 팀 적응에 그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에 김봉길 감독도 "김남일이 주장을 맡은 뒤로 선수단 분위기도 단단해졌고,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알아서 열정적으로 훈련에 임한다"라며 흡족해 했다. 달라진 인천의 배경엔 달라진 김남일이 있는 셈이다.
전성호 기자 spr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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