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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DNA] "나라 위해서라면..." 빚더미 회사도 껴안은 '시멘트왕'

재계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DNA서 찾는다
<11>동양그룹 이양구 회장①


[아시아경제 황상욱 기자] 지난 1956년 서남 이양구 회장(瑞南 李洋球)은 삼척세멘트(현 동양시멘트) 인수를 제안 받았다. 당시 삼척세멘트는 시설이 낡은데다 경영자금마저 부족해 적자에 시름하고 있었다. 인수를 결심한 서남이 몸담고 있던 동양제당 경영진은 "다른 돈벌이도 많은데 왜 골치 아픈 공장을 인수하느냐"고 반대했다.

다른 기업들은 제분, 제당, 면방직으로 손쉽게 돈을 벌고 있었다. 서남은 회사 간부들과 동업자였던 이병철, 배동환씨를 간곡하게 설득했다. 결국 당시 돈 1억환에 인수했는데 6개월도 채 안 돼 1억환 적자를 내고 말았다. 마지못해 인수에 응했던 이병철씨에 이어 배동환씨까지 삼척세멘트에서 손을 뗐다. 처음부터 인수에 적극적이던 서남에게 공이 넘어왔다.


"사회 전반적인 차원에서도 무언가 공헌할 수 있는 그런 업종은 없을까 하는 걸 늘 생각해 왔다. 도로와 항만 그리고 전후 폐허가 돼버린 주택 등 모든 분야에 시멘트는 필수불가결의 상품이었다. 나는 만난(萬難)을 배제, 이를 위해 생애를 바치는 데 조금도 후회가 없음을 자신했다."

서남이 기업의 사회공헌에 대한 투철한 신념으로 국가기간산업에 투신한 데에는 남다른 소년기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업보국의 경영철학을 세우다


동양시멘트 창업주 서남은 1916년 10월14일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풍서리 58번지의 작은 농가에서 부친 이교흠씨와 모친 김성자씨 슬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비교적 넉넉했던 가세가 조부의 별세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부친마저 2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면서 서남의 어린 시절은 가파른 역경으로 접어들게 된다. 남편을 잃은 충격과 생활고가 겹쳐 내내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대신해 서남은 어린 나이에 행상에 나서야 했다.


1931년 15세의 나이에 뒤늦게 초등학교 졸업장을 움켜쥔 그의 손은 마디마디가 온통 부르터 있었다. 집안 형편상 도저히 진학을 꿈꿀 수 없었던 서남은 '함흥물산'이라는 식료품 도매상에 취직한다. 남보다 근면하게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불철주야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한 끝에 3년 만에 정식사원으로 인정받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서남은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정직과 신용'이라는 상도를 깨달았다. 또 일본 기업에 근무하면서 느낀 나라를 빼앗긴 설움은 서남이 기업을 창업한 뒤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굳은 철학으로 승화, 발전되기에 이른다.


1938년 서남은 8년간 저축한 돈을 자본으로 식품도매상인 '대양공사'를 개업했다. 서남이 선택한 유일한 경영지침은 오직 근면과 성실 그리고 정직이었다.


◆'광복'과 '한국전쟁' 속에서 사업의 기틀을 닦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발령된 회사강제청산령으로 인해 회사의 문을 닫아야 했다. 1945년 서남에게 광복은 말 그대로 새로운 출발을 의미했다. 곧바로 다시 '대양상회'를 열고 내친 김에 함흥 일대의 식료품 공급망을 모두 독점하려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38선이 그어지고 북녘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사회주의 체제는 자유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상인에게는 적절한 곳이 아니었다. 결국 월남한 서남은 서울에서 그동안 터득한 경험을 토대로 자전거 한대를 밑천 삼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과자 판매에 뛰어들었다.


그는 과감하게 외상거래를 제안했고 이러한 판매제도를 스스로 '수형거래'라 불렀는데, 이는 과자를 배달한 뒤 보름 후에 대금을 수금하는 방식으로 남한에서 실시된 최초의 외상거래였다. 제과업계나 후일 대기업을 일으킨 타기업의 창업주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서남은 근면함과 독창적인 판매방식으로 거래선은 날로 늘어갔고 취급하는 물품도 과자뿐 아니라 설탕 등 기타 식료품에까지 미쳤다. 그는 자전거 한 대로 거리에 나선 지 꼭 1년만인 1947년 자본금 600만원으로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동양'이라는 회사명이 최초로 등장한 회사를 세우게 된 것이다. 동양식량공사는 1년 후 전국적인 판매망을 구축하기에 이르렀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자산규모가 10억원에 달하는 성장을 이룩했다.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으로 인해 서남이 발로 뛰며 일구어놓은 사업기반은 물론, 생의 근거까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그동안 쌓은 신용을 바탕으로 서남은 부산에서 설탕도매업을 다시 시작했다. 전시 특수경기와 생필품이 절대 부족했던 당시 경제적 여건과 서남의 뛰어난 상재(商才)와 경영술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마산, 대구 등지에까지 사업영역이 확장됐고 어느덧 사람들은 서남을 '설탕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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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욱 기자 o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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