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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우리 이 나라에서 먹고 살게 해주세요"


[아시아경제신문 박소연 기자]'구시렁거림'은 힘 없는 자들의 전유물이다. 뭔가 못마땅하지만 앞에다 대고 당당히 말할 용기가 없기에 뒤에서 끊임없이 구시렁 구시렁거린다. 힘없는 사람들 일수록 할 말은 더욱 많은 법이다.

연극 '늘근도둑이야기'에서 두 늙은 도둑도 끊임없이 구시렁거린다. 지난 날 자신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에서부터 돈을 훔치면 어떻게 분배를 할 것인지까지 이어지는 그들의 만담은 관객들의 배꼽을 빼놓는다.

더 늙은 도둑과 덜 늙은 도둑, 두 '늘근 도둑'은 사회보다 형무소에서 더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새 대통령의 취임 특사로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풀려 나오지만, 갈 곳도 먹을 것도 없이 거리를 헤매는 신세다.

배운게 도둑질뿐이라 몰래 숨어든 미술관의 금고를 털기로 한다. 개들이 잠자는 새벽 2시에 작전을 개시하기로 하고, 두 노인은 그 짬을 이용해 마른 멸치를 안주삼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하며 만담을 나눈다. 한 많은 이 도둑들의 과거지사 이야기는 끝이 없다.

결국 금고는 열어보지도 못하고, 경비견에게 발각돼 만신창이가 돼 붙잡힌 두 도둑은 경찰서 조사실에서 말보다 폭력이 앞서는 수사관에게 조사를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구시렁거린다.

이렇게 뚜렷한 스토리도 없이 웃기는 공연이 또 있을까. 두 늙은 도둑의 만담으로 점철되는 이 연극을 보고 있노라면 최근 우리 주변의 '구시렁거림'이 떠오른다.

촛불이 구시렁 구시렁거렸다. 미네르바도 구시렁거렸다. 정부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들지만 힘이 없어, 달리 방법이 없어 구시렁거렸다. 숨어서, 모여서 구시렁거렸다.

여기서 늙은 도둑들의 구시렁거림은 잡혀가서도 멈추지를 않는데, 들릴 듯 말 듯한 그들의 구시렁거림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힘없고 한많은 처지를 구시렁거림으로 풀어낼 뿐이데, 수사관은 이들의 '구시렁거림'을 간첩행위로까지 비약시킨다.

이름도 성도 밝히지 않는 두 도둑을 두고 있지도 않은 범행배후와 있을 수도 없는 사상적 배경을 밝혀내려는 수사관은 투철한 사명감으로 철저하게 조사하는데. 결국 두 늙은 도둑의 전과기록에서 밝혀진 죄목은 식권위조-마늘절도-무전취식 등 '생계형 잡범'이었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아시아경제 & 스투닷컴(stoo.com)이 만드는 온오프라인 연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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