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자연을 거닐던 방랑자…자연을 거스른 방해자

자연에 순응한 유목민 역사 재조명
지금의 풍요는 어쩌면 그들의 유물
현실 벗어나려는 인류의 삶은 역설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서 글이 시작된다. 양 떼를 먹일 목초지를 찾아 주기적으로 이동하는 바흐티야리 부족민들이 사는 곳이다. 글쓴이 앤서니 새틴은 부족민들의 배려로 며칠째 그들과 같은 천막에서 지내고 있다. 자연이 베푸는 것만을 취하며 자연에 순응하는 바흐티야리 부족민들. 그들과 삶을 이야기하며 새틴은 영혼이 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기쁨을 느낀다. 새틴에게 이곳은 낙원이나 마찬가지다.

새틴은 자그로스 산맥에서의 경험을 서문에 풀어낸 뒤 낙원에 대한 이야기로 본문을 시작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낙원, 에덴 동산을 언급한다.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처럼 새틴에게 현생 인류는 동산을 잃어버린 존재다. 자연을 정복하려 들면서 함께 살아야 할 동식물을 위기에 빠뜨리고, 스스로도 생존의 위기에 처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새틴은 동산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자연에 순응했던 유목민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유목민의 역사는 거의 1만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는 튀르키예의 남쪽, 시리아와 국경을 이루는 곳에 있는 고고학 유적지다. 우리 말로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뜻인데 1963년 우연히 발견됐다. 이곳의 진정한 고고학적 가치가 확인된 것은 클라우드 슈미트라는 이름의 독일 고고학자 덕분이다. 슈미트 박사는 괴베클리 테페가 처음 발견되고 30여년이 흐른 1994년, 괴베클리 테페에서 부싯돌을 보았다는 이웃마을 노인의 말을 듣고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부싯돌은 고대인들이 기반암을 매끄럽게 깎을 때 사용한 도구였다. 세공의 단서를 찾은 슈미트 박사는 본격적인 발굴에 나섰다. 최고 높이 5.5m, 최대 무게 16t에 달하는 거석들이 발견됐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괴베클리 테페의 형성 시기가 기원전 9500년 무렵으로 조사됐다는 점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나 영국 스톤헨지보다 약 70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슈미트 박사는 괴베클리 테페를 건설한 이들이 맥주 비슷한 것을 주조했지만 이들이 이곳에 거주한 흔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요컨대 괴베클리 테페는 약 1만2000년 전 유목민들이 이룬 수준높은 문명의 흔적인 셈이다.

유전학적으로 유목민의 삶이 인간을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DRD4-7R은 ‘유목민 유전자’로 일컬어지는 변이 유전자다. 케냐 북부에 사는 아리알 부족민들 중 약 5분의 1은 DRD4-7R 유전자 보유자인데 노스웨스턴 대학이 이들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아리알 부족민들의 삶은 정착민과 유목민의 삶이 혼재돼 있다. 저지대에서 낙타, 염소, 양을 치며 이동하는 삶을 사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일부는 고지대에서 작물을 키우며 정착 생활을 한다. 연구 결과 이 변이체 보유자의 경우 정착민과 유목민의 건강 상태가 상반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착 생활을 하는 유목민 유전자 보유자들은 영양 상태가 열악하고 체력이 약하지만, 유목 생활을 하는 이 유전자 보유자들은 영양 상태도 좋고 체력도 강했다. 즉 유목 생활을 해야 더 건강한 삶을 사는 셈이다. 이 유전자는 쾌락, 행복을 일으키는 호르몬인 도파민의 분비를 제어한다. 도파민이 유목민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셈이다.

ㅗ시

새틴은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유목민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여러 고대 문명의 신화를 다루는 대목은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흥미롭다.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신 오시리스는 나일강 사람들에게 농사를 짓고 정착해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오시리스의 동생 세트는 사막을 지배하는 유목민의 왕이다. 오시리스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세트는 형 오시리스를 질투한다. 결국 세트는 연회를 마련해 오시리스를 죽인다. 오시리스는 여동생인 이시스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시스가 오리시스의 시신을 수습한다. 세트가 오시리스의 시신을 14조각내 나일강에 뿌렸는데 이시스는 이 중 13조각을 수습하고 찾지 못한 오시리스의 음경은 나일강의 진흙으로 만들었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시신을 아마포로 꽁꽁 싸매 최초의 미라를 만들었다.

새틴은 책을 통해 유목민의 삶을 따르자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유목민들이 고대로부터 얼마나 수준 높은 문명을 이룩했는지 보여주며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충분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새틴에 따르면 유목 생활을 했던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2.5㎢당 10명 이상의 집단을 이룬 적이 드물었다. 식량이 부족해 그 이상을 먹여 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는 같은 면적에 20만명 가까운 사람이 산다. 여분의 식량을 생산해 필요할 때까지 저장하고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풍요로운 세상이 됐음에도 많은 이들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새틴은 지난 세기에 인류의 대부분은 크고 작은 도시에 정착했고, 인류의 삶은 자연계를 떠나 벽 안에 사는 형태로 극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우리 중 일부를 사악한 인간, 신뢰할 수 없는 동반자, 마약 중독자, 스릴을 쫓는 사람, 도박꾼,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으로 바꿔놓았다고 꼬집는다.

노마드 | 앤서니 새틴 지음 | 이순호 옮김 | 까치 | 464쪽 | 2만2000원

문화스포츠팀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