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민기자
2015년 6월25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전한 발언은 여의도 정가를 뒤흔든 경랑의 기폭제였다. 당시 청와대도 여당도 그리고 여당도 국무회의 메시지가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전환점으로 이어진 사건의 시발점.
박 대통령이 겨냥한 배신의 정치 당사자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야당을 향한 메시지일 것 같지만 당시 정치 상황을 고려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박 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표출한 배경에는 여야가 합의 처리한 국회법 개정안이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날 거부권 행사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4월4일 양곡관리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할 때까지 7년간 대한민국에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없었다.
2015년 6월의 당시 대통령 결정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가 행정입법의 수정 변경을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는 등 국회의 행정부 감시기능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해당 법안은 당시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물론이고, 여당인 새누리당의 참여로 처리된 법안이다.
새누리당 내부의 친박근혜계를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국회 본회의 통과라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전한 ‘배신의 정치’ 대상은 여당 원내대표를 향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정치인 유승민이었다.
박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겨냥해 “정치는 자기의 정치 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현직 대통령이 현직 여당 원내대표를 향한 불신임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당시 여당은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당내에서 불거졌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사퇴 요구에 즉각 반응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했다.
대통령과 여당 일부 의원들이 원내대표의 불신임을 제기한 상황에서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 유승민 원내대표는 6월25일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이 나온 지 약 2주 후인 7월8일 자진해서 사퇴했다.
정치인 유승민은 원내대표 사퇴의 변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정치인 유승민의 사퇴 변은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 이후 당내에서 불거진 사퇴 압박과 의원총회를 통한 사퇴 권고 결정이라는 상황에 대한 심경을 담은 것이다.
왜 정치를 하는지, 어떤 정치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치인 유승민은 그렇게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여당 원내대표의 사퇴로 이어진 박 대통령의 메시지는 정치적 부담으로 남았다. 2015년 6월과 7월의 연이은 사건은 결과적으로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의 균열을 대중에 고스란히 노출했다.
2016년 4월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은 공천 대학살의 후폭풍에 직면했다. 정치인 유승민은 2016년 3월24일 새누리당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무소속 후보 유승민은 대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살아 돌아왔다.
2016년 여의도 정가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12월 대통령 탄핵은 여러 정치적 사건이 겹친 결과물이다. 2016년 4월 총선에서의 공천 파동도 2015년 6월 박 대통령 ‘배신의 정치’ 메시지도 2016년 12월 탄핵이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끓게 한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