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적십자사 회비모금 위한 세대주 정보 제공 합헌'… 첫 판단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사)가 회비 모금을 위한 지로통지서 발송을 위해 국가나 지방자치단로부터 각 세대주의 이름과 주소 등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한 근거 법령들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의 첫 판단이 나왔다.

본인의 동의 없이 이 같은 정보들을 제공하도록 한 것이 정보 주체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지만, 제네바협약의 체약국으로서 정부가 적십자사의 활동을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점이나 인도주의 사업을 수행하는 적십자사의 특수성 등을 고려할 때 과잉금지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취지의 결정이다.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3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는 적십자사로부터 회비모금 등을 위해 필요한 자료제공 요청을 받은 국가·지자체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자료를 제공하도록 한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적십자법) 제8조 3항 등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청구 사건에서 재판관 7(합헌)대 2(위헌)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헌재는 필요한 자료의 범위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한 적십자법 제8조 2항과 적십자사가 요청할 수 있는 자료의 범위에 '세대주의 성명과 주소'를 포함시킨 시행령 제2조 1호에 대해서도 합헌 결정했다.

적십자사는 2020년 적십자회비 모금을 위해 관련 법령에 따라 2019년 10월 22일 행정안전부에 전국의 세대주(만 25세 미만 및 만 75세 이상 세대주, 20대 단독 세대주, 고지 제외 요청자 제외)의 성명과 주소를 요청했다. 행안부장관은 2019년 10월 31일 적십자사에 만 25세부터 74세까지의 거주자 중 세대주의 성명 및 주소 총 1766만2388건을 제공했다.

적십자사는 행안부장관이 제공한 세대주 정보를 바탕으로 2019년 11월 적십자회비 1만원을 2020년 1월 31일까지 납부할 것을 안내하는 취지의 지로통지서를 각 세대주에게 발송했다. 이번 헌법소원심판을 낸 청구인들은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국가 등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개인정보를 적십자사에 제공하도록 한 것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는 문제가 된 법령 규정들이 포괄위임금지의 원칙이나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해 청구인들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필요한 자료의 구체적인 범위를 미리 법률에 상세히 규정하는 것은 입법기술상 어렵다"며 이를 대통령령에 위임한 것은 포괄위임금지원칙에 위반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자료 제공을 거절할 수 있는 '특별한 사유'에 대해 "비록 불확정적인 개념이지만 개인정보 보호법의 취지를 고려하면 '정보 주체 또는 제3자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을 때’에 준하는 경우'로 대강의 규율 범위를 예측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제공되는 정보의 범위와 관련 "'주소'의 경우 지로통지서 발송을 위한 필수적인 정보이고, '성명'은 사회생활 영역에서 노출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정보로 엄격한 보호의 대상이 된다고 하기 어렵다"고 봤다.

다만 이선애·문형배 재판관 등 2명은 다수의 재판관들과 달리 적십자법상 자료제공조항이 명확성 원칙에 위배되고, 제공할 자료의 범위를 정한 시행령 중 '성명'에 관한 부분은 과잉금지원칙에 반해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해 위헌이라는 반대의견을 냈다.

이번 사건은 적십자사 지로통지서가 전국의 세대주에게 발송될 수 있었던 근거규정인 적십자법과 그 시행령이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지에 대해 헌재가 처음으로 판단한 사건이다.

앞서 2015년 당시 대통령이자 대한적십자사의 명예총재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상대로 적십자사가 자신의 동의를 받지 않고 주소와 같은 개인정보를 수집해 적십자 기부금 모금을 요청하는 우편물을 보냈다고 주장하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 A씨가 소송 도중 적십자법 관련 조항들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다가 기각되자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지만, 위헌 여부에 따라 판결의 주문이 달라지지 않는 등 재판의 전제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각하됐다.

한편 심판대상조항들은 개정되지는 않았지만, 2023년도 적십자회비부터는 '최근 5년간 적십자회비 모금에 참여 이력이 있는 세대주'에게만 지로통지서를 발송하는 것으로 모금 실무가 개선됐다.

사회부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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