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노조와 대화 끊은 정부, 직무급제 망친다

“미국 본사에서 현지 비서에게 커피를 부탁했더니 '내 직무가 아닙니다'라고 하더라구요. 본인 직무에 ‘서빙’은 없다는 거죠. 다른 직원들도 비서의 행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주어진 직무만을 오롯이 수행하고 합당한 임금을 받는 것. 그게 직무급제의 본질입니다.”

직무급 컨설팅을 담당하는 글로벌 회계법인 임원의 말이다. 직무급제는 단순히 업무를 나누고 월급을 차등하면 끝나는 제도가 아니다. 기업과 노동자가 합의한 직무를 서로가 엄격하게 지키고, 가치에 따라 확실한 보상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려면 기업의 채용방식, 인사제도, 노조문화, 경영윤리, 기업관행 등이 모두 달라져야 한다. 직무구분 없이 '이일 저일' 시키는 한국의 근로문화를 고려하면 바꿔야 할 게 산더미다.

직무급제는 대대적인 혁신이 필요한 노동개혁이라는 뜻이다. 성공적인 직무급제 도입과 노동개혁을 완수하려면 대화가 필수다. 전문가들도 “합의가 없다면 직무급제 개혁은 무조건 실패한다”고 입을 모은다. 직무급제를 도입한 선진국들도 모두 노사합의가 이뤄졌었다. 직무급제가 임금하락을 유발하지만 노동자 권익향상에 도움을 준다며 국가가 설득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이 성공적으로 직무급제를 안착시킨 비결이다.

그런데 현 정부가 공공기관을 상대로 추진하는 직무급제 논의는 ‘생산성 향상’과 ‘임금 효율화’ 수준에 머물러있다. 민간 부문에는 유인책을 제시하는 정도다. 상급노조와의 대화노력은 없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대타협을 어떻게 만들어낼지에 대한 고민이 정부에게서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수준 높은 직무급제를 만들어내려는 의지가 안 보인다.

1969년 일본의 대표 ‘극우’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극좌’ 단체인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학생 1000명과 조우했다. 정반대의 생각을 가졌지만 토론은 수시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상호 접점도 이끌어냈다. 사상이 달라도 꼭 대화해야 하는 ‘카운터파트’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노사 문제라고 다르지 않다. 대화와 협상으로 직무급제 개혁의 물꼬를 터야 한다.

경제금융부 세종=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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