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을 책임진 집권 여당의 내부 갈등이 연쇄 소송전으로 번지고 있다. 비상대책위원회 효력 정지 가처분 소송에서 일부 인용 판결을 받아낸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달 29일 비대위 활동 중단을 위한 가처분 신청을 추가로 신청했다. 비대위원장을 맡았던 주호영 국민의힘 의원도 자신의 직무 정지 결정을 멈춰달라는 집행정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 이를 두고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를 심화시키는 퇴행을 자초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보수 진영 논객들과 언론들도 법원 결정에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법원의 직무는 합법성을 따지는 것인데 정당민주주의 훼손을 논하는 것은 월권적인 정치 개입"이라며 사법의 과잉지배에 난색을 표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도 "이번 가처분 판결은 국민의 힘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모든 일을 법원으로 끌고 가는 정치소멸의 심각한 국면에 직면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치 사법화가 심해진 원인은 법원 판결 자체에 있지 않다. 중요한 정치 현안들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법원의 법적 판단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사법만능주의’ 삼류 정치가 축적돼 작금의 사태를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선거를 통해 평가와 심판을 받으면 된다는 일각의 주장을 무시했던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부터 여야의 법질서 확립을 이유로 경쟁적으로 법원에 고발장을 제출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들도 정치 퇴행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여전히 ‘법치’로 정치를 대신하려 하거나 입장에 따라 너무도 쉽게 사법부 불신을 초래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전임 정부의 정치적·정책적 선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사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한다거나, 수시로 정치를 법원으로 끌고 가면서도 불리한 판결이 나올 때면 거꾸로 사법부를 공격한다. 그런 정치권을 보면서 과연 어떻게 이 격랑을 스스로 헤쳐 나갈지 심히 염려가 된다.
법조인 출신 금태섭 전 의원은 지난해 한 강연에서 "법에는 승소와 패소만 있을 뿐이며, 법의 영역이 덜 확대될수록 민주주의는 성숙돼 간다"며 고위공직자와 정치인들에게 고소·고발이 아닌 화해와 타협에 의한 정치 동참을 호소한 바 있다. 이제 사법만능주의 삼류 정치는 여기서 그만 끝내야 한다. 대화와 타협의 공론 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력을 키워가야 한다.
추석 명절이 다가왔다. 이번 추석에는 한국 정치사에서 처음 겪는 집권 여당의 진흙탕 싸움과 정치의 사법화를 부추기는 정치력 부재가 화두가 되고 20개월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한국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여론이 형성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기성 정치권에 주어진 대국민 신뢰 회복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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