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담쟁이를 위하여―아버지/배영옥

당신의 빛나는 손바닥을 가진 적이 있지. 당신 손바닥 위에서 나는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 봐 나는 매일 뒷골목을 맴돌았지. 당신 손바닥에 있을 때만 나는 어린아이였지. 여전히 어린아이고 싶었지. 당신 손바닥에 달린 천 개의 창으로 나는 세상을 보았지. 당신 손바닥이 보여 주는 뒷골목의 사람들은 아름다웠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 봐 나는 매일 붉은 벽에 서서 바람을 마셨지. 지독한 행복이었지. 당신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그 빛나는 상처를 품고 나는 어른이 됐지. 어린아이고 싶은 어른이었지. 혼자서도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는 어른이었지만, 나는 결코 손바닥을 뒤집을 수 없었지. 행여 당신 손바닥이 쏟아질까 봐,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 봐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살았지. 그리운 기척 같은 버릇이었지.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현대시는 몇 편 혹은 때론 시집 한 권을 다 얽어 읽어야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까닭은 현대시의 처소인 인간의 내면이 그만큼 다양한 주름들과 겹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만 해도 그렇다. '담쟁이'로 표상된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시적 화자 간의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예컨대 "지독한 행복"이라든지 "빛나는 상처"라든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 봐"라는 구절들은 단지 역설이거나 반어가 아니라 몇 마디 말로는 결코 해명할 수 없을 생의 온갖 굴곡들이 부풀어 오르거나 깊이 패인 "기척"들인 셈이다. 그런데 그 "기척"들은 과연 그립기만 했을까. 안타깝게도 배영옥 시인은 올 여름에 타계했다. 채상우 시인<ⓒ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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