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빈 화분에 물 주기/이근화

어디에서 날아온 씨앗일까누가 파 온 흙일까마시던 물을 일없이 빈 화분에 쏟아부었더니며칠 지나 잎이 나온다욕 같다너 내게 물 먹였지그러는 것 같다미안하다 잘못했다그러면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그러지 못하고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몰라봐서 미안하다그런데 끝까지 모르겠다너 누구니, 아니 댁은 누구십니까잎이 넓적하고 푸르다꽃 같은 것도 피울 거니그럼 정말 내게 욕을 하는 거야안녕하십니까, 묻지 마 내게당황스럽잖아 나더러 어쩌라고계속 물을 주어야 한다불안하면 지는 거다그런데 더 주어야 하나 덜 주어야 하나그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의심하는 거다너는 어디서 왔니족보를 따지는 거다상상하는 거다너 아무것도 아니지나의 몽상이구나나란 망상이구나죽고 없는 거구나잘 살기란 온전하기란불가능한 거구나빈 화분에 물을 주며나는 하루하루 시들어 간다최선을 다해 말라 간다■이 시는 좀 느닷없다. "마시던 물을 일없이 빈 화분에 쏟아부었더니" "며칠 지나 잎이 나"왔는데, 그걸 두고 "욕 같다"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 같다"는 곧이어 "미안하다 잘못했다"로 이어지고, 시인은 문득 돋은 잎에 온통 매이게 된다. 심지어는 "빈 화분에 물을 주며" "최선을 다해 말라 간다"라고까지 적어 놓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시의 핵심은 '미안함'이다. 즉 시인은 우리의 안온한 일상 속으로 어느 날 갑작스럽게 틈입한 생경한 목숨에 대한 윤리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친구도 애인도 자식도 이웃도 모두 저 잎과 다르지 않다.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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