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한 끼] ‘바보들의 행진’ - 포장마차 우동은 40년 전에도 맛있었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 속 영자가 먹는 우동은 먹고사는 문제로 귀결되는 '생존'의 엄중함을 은유적으로 품고 있다.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H대 불문과에 다니는 영자는 연극반 공연에 매진하느라 전공 시험을 엉망으로 치렀다. 소개팅서 만난 철학도 병태를 잠시 포장마차에 구겨 넣고 한밤중 전공 교수님 댁에 찾아간 영자. 그녀의 기말 시험지를 들고나온 교수의 표정은 황당함이 가득하다. 카뮈의 ‘이방인’ 1부 2장에 나타난 메르소의 심리상태를 논하라는 문제에 영자는 “그건 작품을 쓴 카뮈만이 알 뿐이지, 우리들이 메르소의 심리상태를 분석한다는 것은 명작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써낸 터. 그녀는 혼신의 눈물연기(?) 끝에 리포트 제출로 낙제를 면해주겠다는 교수의 약속을 받아낸다.포장마차에서 일어나려던 병태에게 ‘이방인’을 읽었느냐 물어본 뒤 태연히 리포트 작성을 부탁하는 영자. 허기를 달래려 시킨 우동은 1분 만에 뚝딱 나오고, 그녀는 우동을 맛있게 먹는 1분 사이에 병태에게 리포트 대필 확답을 받아낸 뒤 종종걸음으로 포차를 나선다.생맥주와 청바지문화로 대변되는 70년대 청춘 문화를 생생하게 그려낸 ‘바보들의 행진’ 속 주인공들은 맥주, 소주, 막걸리를 마시며 시대의 우울과 청춘의 고독을 달래지만, 끼니를 챙기는 이는 100분의 러닝타임을 통틀어 영자가 유일하다. 자기 기준과 목표가 확실한 영자는 불확실한 철학도와의 연애 중에 기민하게 의사 오빠도 만나고, 자신을 ‘바겐세일’ 하고 싶지 않다며 병태와의 이별 선언도 신속하게 통보하는 당찬 여성. 영화 속 청춘들은 하나같이 먹지 않고도 허기를 잊은 채 술에 취하기를 반복하는데, 영자만은 우동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워낸 뒤 성적과 연극을 갈채 속에 마치고도 술이 아닌 우울과 자기 미래에 대한 고민에 취해 든다.명장면으로 회자되는 마지막 입영열차 키스씬에 앞서 영자는 병태에게 “밥 먹었니?” 묻고는 새벽부터 준비했을 김밥 도시락을 차창 사이로 건네고 입술을 훔친다. 병태는 군대 가는 열차 안에서 영자가 싸준 김밥을 삼키고 나서야 비로소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취한 세상 속 영자의 우동 한 그릇은 현실감각, 청춘의 취기가 깨고 나면 마주해야 할 생존의 엄중함으로 내려앉는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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