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의 도시이야기]100년만의 광복 맞은 남산 예장자락

도시이야기 서울 중구 예장동일제 치하 신궁·日人 거류지도시재생으로 제모습 찾을까

1967년 촬영한 남산 일대 무허가건물(자료:서울시)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이승만ㆍ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혹은 그보다 앞서 일본 제국주의 손길이 닿지 않았더라도 서울 남산은 오롯이 자연 그대로 산의 모습을 갖고 있긴 힘들었을 테다. 서울의 한 가운데 있어 전국의 어느 산보다 많은 사람이 찾는 데다 눈길이 잘 닿는 만큼 과거 권력자가 전시성 행정을 펼치기 위한 주 무대로 활용코자 했기 때문이다. 이권을 노린 자본의 탐욕이 곳곳에 배어있는 한편 억압과 폐쇄, 권위의 상징 옛 중앙정보부가 있던 터이기도 하다. 지금의 퇴계로 일대에서 남산쪽을 바라볼 때 마주하는 중구 예장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예장동이란 동명은 옛 마을이름 예장골에서 따왔다. 조선시대까지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이었고 무예장을 줄여 예장이라 했던 데서 유래했다. 과거 임진왜란 때 왜장 마스다 나가모리가 남산 중턱 일대에 진지를 구축해 터가 남아있다고 해서 일제 당시 왜성대장이라 부르기도 했다.1960~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쪽 공무원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남산파괴'가 일제 때 시작했다고 단언한다. 직접적으로는 남산 기슭에 참배를 위한 조선신궁을 짓기 시작한 1920년. 참배객을 위해 신궁 주변에 도로를 내고 일대 공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고종 때 맺은 한성조약에 따라 1885년 남산 중턱 녹천정 자리와 일대를 일본공사관과 영사관 부지로 내줬다. 같은 해 진고개 일대, 오늘날 중구 예장동과 주자동, 충무로1가에 이르는 지역을 일본인 거류구역으로 정했다.당시만 해도 4대문 밖이었던 데다 진흙지대로 거주환경이 나빠 당시 조선 관리들도 쉽게 수긍한 것으로 전해진다. 첫해 100명이 채 살지 않았는데 이후 꾸준히 늘어 1910년 말께 들어선 8794가구, 3만4468명이 거주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이후 이곳에 터를 잡은 일본거류민회는 남산 일대에 공원과 군사시설, 신사를 잇따라 만들었다. 우리 정부의 친일각료도 힘을 보탰다.일제 때 폐교된 숭의여학교를 부활하고자하는 움직임이 한국전쟁 중 생겨났고 전쟁이 끝나기 전 1953년 4월 재단법인 숭의학원이 인가를 얻었다. 이북5도 출신으로 여성ㆍ기독교계를 대표하던 박현숙 초대 이사장이 주도했다. 학교터를 찾던 중 남산 중턱의 경성신사 자리를 점찍고는 당시 사실상 점거하고 있던 최기석 군경유자녀보육원장과 교섭에 들어갔다. 국유지였음에도 최 원장이 미리 점검하면서 고아를 위한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긴 협상 끝에 1954년 6월 중구 예장동 산5번지 일대 경성신사 터에 숭의학원이 자리를 잡았다. 터는 생겼지만 건물을 올리긴 쉽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이나 당시 서울시장은 어떻게든 허가를 내주려고 한 반면 담당 공무원들은 공원용지였던 탓에 완강히 맞섰다. 지난한 협상 끝에 몇 가지 조건을 달아 결국 허가가 났다. 가건축일 것, 언제든 철거 가능할 것, 시의 설계에 순응할 것 등이 조건이었다. 건축허가가 나기 전부터 이미 공사에 들어갔고 미군 공병이 도왔다. 이후 10여년 간 꾸준히 부지를 넓히고 시설을 늘렸다.박원순 서울시장이 예장동 일대 도시재생을 추진하면서 '한 세기 만의 광복'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작용했다. 남산 제모습 찾기계획은 앞서 199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추진됐는데 그 성과를 체감하는 서울시민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민성 회복을 기치로 내건 이번 예장자락 재생사업에 한번 더 기대를 거는 이유다.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건설부동산부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