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우리가 볼 수 있는 것/김행숙

하염없이 승강장 벤치에 앉아 있다. 스크린도어에 비친 내 얼굴이 터널 속에서 어른거렸다. 떠나지 못하고 같은 곳을 맴도는 지하철의 유령들과 섞여 있었다. 밖에서 당신을 봤어. 어젯밤 남편이 말했다. 제발 아무 데서나 불행한 여자처럼 넋 놓고 앉아 있지 마. 그는 수치심을 느낀 것처럼 보였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승강장 안으로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노란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섰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을 조금 더 모르고, 당신이 나를 조금 더 모르면, 우리는 어쩌면 조금 더 좋은 사이일지도…… 정전이 돼도 지하철은 환하다. 한낮의 수면내시경 검사처럼 열차가 유령들을 관통했을까. 안개가 걷히는 하늘처럼 유령들이 열차를 통과했을까. 스크린도어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스크린도어가 열린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본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앞면과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뒷면. 나는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지 않는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뒷면과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앞면. 그리고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한다. 
■흔히 우리는 인식의 최초이자 최종 심급으로 시각을 지목하곤 한다. 한마디로 '보았다'를 진리의 판단 근거로 삼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물론 아니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본다"라는 문장은 "나는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래서 실은 나는 제대로 "당신을 보지 못한다"라는 뜻인 셈이다. 그리고 "노란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면 그래서 나와 당신이 서로 "조금 더 모르면, 우리는 어쩌면 조금 더 좋은 사이일지도"라는 가정은 "밖에서 당신을 봤어"라는 남편의 목격담과 무관하지 않다. 쉽게 말해 우리는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고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아니 "스크린도어에 비친 내 얼굴"처럼 바로 우리 곁에, "떠나지 못하고 같은 곳을 맴도는 지하철의 유령들과 섞여 있"다.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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