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詩]자화상/유하

텅 빈 양재 천변 길, 오늘도 자전거를 달린다밤새 내린 비에 없었던 지렁이가 보이고송장메뚜기 한 마리 풀쩍 잡초 속으로 날아간다아내는 직장에 간 시간나는 자전거나 타면서 고작 지렁이도 익사를 할까쑥부쟁이는 쑥과 뭐가 다른가 따위의 사소함을 붙들고 있다몇 년째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자전거 위에서 몇 편의 시를 구상했을 뿐언제나 핵심을 피해 왔다시험 전날 만화방에 앉아 있는,목적지를 놔두고 샛길에서 해찰하는 아이처럼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의 가슴엔 늘 쓸모없는 것들만다녀간다 가을 빛에 젖은 억새풀과 노란 은행잎 몇 개길 옆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소학교에선 운동회가 한창이다내 자전거엔 어느새 함성 소리처럼 날개가 돋아유년의 운동회로 나를 데려간다은빛 운동장 저편엔 젊은 날의 어머니가 있고그녀와 이인삼각으로 달려가는 어린 날의 내가 있다내 자전거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붉게 물들어정적 속의 내게로 되돌아온다세상을 삼킬 것 같았던 어제의 열망은 이제나의 몸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노는 자여나는 이미 오래전에 예감했었는지도 모른다집으로 저물어 돌아가는 나의 자전거가텅 빈 가을 하천의 사소한 풍경을 완성시키고 있는 이 순간을 
■ 이제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유하 시인의 이 시는 2000년에 출간된 그의 시집 속에 실려 있다. 다들 잘 알겠지만 그때는 IMF 사태 여파로 수많은 가장들이 실직을 했고 취업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길거리에 수두룩했다. 물론 지금도 사정이 그다지 나아진 편은 아니다. 아니 어떤 면에선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시절에 그리고 지금, '노는 자'에 대한 시를 쓰고 그 시를 나누어 읽는 일은 좀 꺼림칙하고 겸연쩍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이 시가 자꾸 더 생각난다. 철이 없어서가 아니다. 혹은 이미 세련된 상품으로 둔갑한 지 오래인 '느림의 미학'을 은근슬쩍 다시 팔아 보자는 심보도 아니다. '열심히 일한 자만이 떠날'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이 세상을 단지 더러워 버린다는 결단의 발로도 아니다. 오로지 어떤 풍경 하나를 복원하기 위해서인데, 그것이 이제는 거의 혁명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진짜 악은 인간을 점점 더 볼썽사납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나지만, 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소한 일상을 아예 철저하게 파괴했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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