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준 기자의 CINEMASCOPE - ‘화차’

[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후배에게 한 소리 들었다. 지난 주에 썼던 ‘하울링’ 리뷰 얘기다. 감독의 색이 묻어나지 않은 매끈한 공산품이라는 혹평과는 달리 배우들의 연기와 짜임새 있는 이야기 등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었다. 순간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이해가 됐다. 일본 원작을 먼저 접하지 않고 영화를 본다면 ‘사족’이라고 판단했던 과한 내러티브가 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의문은 남았다. 철저히 상업 영화에 기반한 ‘할리우드 키드’의 두 눈이 점차 대중의 취향과는 180도 다른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이제 제 2 라운드다. ‘하울링’에 이어 일본 추리 소설 원작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가 또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독 추리 영역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미야케 미유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화차’가 그 영화다. ‘화차’는 거품 경제가 붕괴한 직후인 1990년대 초 일본 배경으로 거대한 자본에 잠식된 현대 소비 사회의 단면과 이에 휩쓸려 지옥으로 가는 ‘화차 火車’에 탄 낙오자들의 이야기다. 미스터리 소설 특유의 긴장감과 속도감에 작가 특유의 인간적인 필치가 더해진 미야베 미유키의 최고 추리 소설 중 한 편으로 손꼽히는 작품이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로 데뷔한 후 ‘밀애’와 ‘발레교습소’ 등 두 편의 ‘독특’한 상업 영화를 연출했던 변영주 감독의 손에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끔찍한 괴물이 되어가는 ‘화차’의 여주인공 쿄코가 어떻게 변주될 지가 최대 관심사였다.영화의 이야기는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결혼을 앞두고 함께 부모님 댁으로 내려가던 중 문호(이선균 분)의 여자친구 선영(김민희 분)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라진다. 그를 찾기 위해 문호는 전직 강력계 형사인 사촌형 종근(조성하 분)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 과정에서 과거 그가 알았던 선영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이 서서히 밝혀진다. 극 중 문호가 관찰자로 기능하는 것은 원작과는 달라진 점이다. 문호의 눈을 통해 선영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 같다.매끈하다. 굳이 원작을 읽지 않아도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소설과 영화 사이의 20년 시간 간극도 느껴지지 않는다. 효과적인 각색이다.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는 추리 소설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두 주인공의 멜로에 집중한 것도 영리한 선택이다. 선영으로 등장하는 김민희의 ‘파리’한 연기는 그 동안 그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통틀어 최고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몇몇 장면을 빼면 ‘화차’에서 감독의 인장(印藏)을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다. 하지만 문제 없다. 두 흥행 실패작 ‘밀애’와 ‘발레교습소’를 염두에 두고 ‘화차’를 보려는 관객들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태상준 기자 birdcag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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