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이야기] 배는 할부로 산다

계약에서 건조까지 4~6회 걸쳐 분할 결제워낙 거액이라 선박금융도 발달

14일 울산 조선소에서 열린 '일신 폴라리스 로열'호 명명식에서 이재성 현대중공업 사장(오른쪽 두번째)의 부인 윤영분 여사(오른쪽에서 여섯번째)가 도끼로 밧줄을 끊은뒤 참석자들로 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상선 한척의 가격은 수백~수천억원에서 수조원대에 이르는 엄청 나게 비싸다.그러다 보니 선사가 조선소에 배를 발주할 때에는 자동차처럼 할부로 대금을 지급한다.단, 자동차의 경우 물건을 받고 일정기간 차 값을 나눠 내는데 반해 선박은 물건을 받기 전 즉 만드는 기간 동안 나눠서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선박은 고객이 먼저 주문을 해 만들어 파는 것이기 때문에 건조 비용을 미리 받는 것인데, 이를 선수금(先收金)이라 부른다.통상 조선사는 선주사와 선박 건조 계약을 체결하는 시점부터 인도식(引渡式)을 가질 때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나눠 받는다. 즉, ▲계약할 때 먼저 20%를 받고 ▲6개월 후에 10% ▲최초 철판을 자르는 착공식 때 10% ▲최초 블록을 도크에 거치하는 기공식(킬 레잉, Keel Laying)때 10%, ▲건조된 선박을 인도할 때 나머지 50%를 받는 식이다.

한진중공업 벌커선 '크리스티나호' 명명식

물론 돈을 지급받는 비율은 선주측의 요구에 따라 매번 다른데, 전체 대금을 어느 시기에 받느냐에 따라 방식이 다르다. 인도시에 50% 이상을 받는 결제 방식은 ‘꼬리(뒷쪽)가 무겁다’는 뜻으로 ‘헤비 테일(Heavy Tail)’ 방식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선주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또한 다섯 단계에 걸쳐 매번 20%씩 균등해서 받기도 한다.매우 드문 경우로 계약 시점에 50% 이상의 선수금을 받는 ‘탑 헤비(Top Heavy)’방식도있다. 조선소의 경우 선수금을 활용할 수 있는 탑 헤비 방식이 좋겠지만 선주사로서는 초기 금융 부담이 크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방식을 이용할 리 없다.조선사는 한 척의 배를 건조할 때마다 그 과정으로 방송카메라 또는 일반 카메라로 촬영한 후 이를 기록 영화로 만들어 인도식때 선주사에게 선물로 증정하곤 한다. 이 때 건조과정을 촬영하는 이유는 선물용으로 뿐만 아니라 각 단계별로 대금을 결제할 때 배를 이렇게 만들고 있다는 보고용으로 제출하기 위해서 이뤄진다.

지난 11일 대우조선해양에서 동시 명명식을 가진 오데브레쉬의 드릴십인 노베 에이트와 노베 나인호.

◆달러 결제 원칙, 환율에 영향 커= 배 값은 국제 기축통화인 달러화 결제를 원칙으로 한다. 이는 국내 선주사와 조선소간 거래도 마찬가지다. 조선소는 수주 물량이 쇄도해도 수주 잔량을 3년 반 또는 4년 치까지만 유지한다. 이 정도 기간이 환율 변동을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는 최대치로 보기 때문이다. 달러는 2000년대 들어 환율 변동이 커지고 있어 환 피해도 커지고 있다. 달러 가득율이 높은 조선사는 선사로부터 수취한 달러를 헤지 등의 방법을 사용해 피해를 줄이고 있다. 이러다 보니 환 시장은 조선소들이 달러 운용을 어떻게 하는 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기고 한다.선주들도 거액의 선박의 건조를 의뢰하기 위해 ‘선박금융’을 활용한다. 선박금융은 선사가 자기 자금만으로 선박 건조가 어려울 경우, 선박을 담보로 하여 받는 장기융자다. 다만 배를 인도하기 전에는 배의 소유권이 조선소에 있어서 선주는 선박금융을 위해 그 배를 담보로 활용할 수 없다.이런 경우 선박금융에서는 조선소가 선수금을 받기 위해 보증 은행으로부터 발급받아 선주에게 ‘선수금환급보증서’(R/G, Refund Guarantee)를 제공한다. R/G는 선수금을 받은 조선소가 파산 등의 이유로 계약을 불이행할 경우 은행이 선수금을 대신 물어주겠다는 보증서로, 이 보증서를 받은 선주는 조선소로부터 환급받을 권리를 담보로 대출은행에 제공해 선주가 선박금융을 받을 수 있다.
배를 인도하고 나서는 선주가 배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배를 담보로할 뿐만 아니라 배를 직접 운영해 발생하는 운영 수입 또는 제3자에게 배를 빌려줘서 받을 수입에 대한 권리 등을 담보로 선박금융을 받는다. 선박금융은 공적수출신용기관인 ECA(Export Credit Agency) 및 국제적인 상업은행의 주도하에 취급되며, 우리나라의 ECA로는 수출입은행과 수출보험공사가 있다. 금융기관들은 조선사에 R/G를 통해 통상 배 값의 50%를 은행에 담보로 제공하고, 은행은 이 보증금액의 0.3~0.4%를 수수료로 뗀다. 1000억원짜리 배 한 척의 보증금액이 500억 원이라면 수수료만도 1억5000만~2억원이 되는 셈이다. 연평균 국내 한국 조선소가 인도하는 선박이 300~400여척에 달한다고 하니, 2000년대 들어 10년에 가까운 조선업 호황 속에 금융기관들이 선박금융을 통해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렸을지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양원모 군인공제회 이사장(가운데)이 성동조선해양 첫 원유운반선(파라마운트 하노버, 11만5000톤급) 명명식 참석 후 조종실에서 Horn Blowing(경적 소리)을 하고 있는 모습.

그러나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사태 후 각 금융기관들은 경쟁적으로 발급하던 R/G를 모두 대형 조선소에게만 발급해 문제가 발생했다. 중소 조선사들의 경우 선주들로부터 거액의 선박을 수주하고도 R/G를 발급받지 못해 이를 포기하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했다.<자료: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STX조선해양>채명석 기자 oricm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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