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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61년 전 오늘, '부다페스트의 봄' 헝가리 혁명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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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61년 전 오늘, '부다페스트의 봄' 헝가리 혁명 발생 헝가리 혁명 당시 시민군에 의해 파괴된 소련군 전차모습(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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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보통 동구권 현대사에 있어서 공산화에 저항하는 반 소련항쟁으로 '프라하의 봄'이 가장 유명하지만, 이 프라하의 봄의 기반이 됐던 운동은 체코가 아니라 헝가리에서 일어났다. 1956년 10월23일 시작돼 17일만에 진압된 헝가리 혁명은 오늘날 '부다페스트의 봄'이라 불리며 동구권에서 진행된 여타 민주화 운동 중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혁명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의해 공산화 됐던 헝가리는 이른바 작은 스탈린이라 불렸던 독재자, '라코시 마차시(Rakosi Matyas)'에 의해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폭압통치가 이어졌다. 라코시는 당 내 반대파 수천명을 숙청했고 산업 국유화, 집단농장 등을 강제 도입했고, 이에따라 헝가리는 극도의 경제적 위기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후 스탈린이 1953년 사망하면서 정치적 세력을 잃었으나 소련의 세력을 배후로 그는 당서기 직함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헝가리 정부의 개혁노선에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1955년 개혁파를 이끌던 너지 임레(Nagy Imre)를 축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헝가리 혁명을 일으켰다. 2만여명의 시민들은 부다페스트에서 스탈린 동상을 철거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봉기가 격화되자, 다음날부터 소련군이 개입을 선언하고 시민군과 시민군으로 돌아선 헝가리군과 함께 교전이 시작됐다. 신정부는 일당제 폐지,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소련의 헝가리 철군 등을 골자로 개혁정책을 발표했으나 소련은 곧바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11월4일부터 소련군 기갑부대가 투입되자 시민군의 저항은 점차 줄어들었다.


결국 11월9일, 헝가리군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장악됐고 11월11일 부다페스트가 완전히 함락되면서 헝가리 혁명은 좌절됐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 시민은 3000여명 이상이 숨졌고 2만여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으며 너지를 비롯한 신정부 각료들은 소련군에 체포돼 교수형을 당했다. 사상자 절반이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을 두고 국제사회의 비난은 쏟아졌지만, 서방의 개입은 없었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뒤이어 발생한 6.25 전쟁이 발발한지 3년 정도 지난 상황이었고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서방의 묵인 하에 헝가리의 반 공산화 운동은 재빠르게 진압됐고, 이것은 12년 뒤 발생한 프라하의 봄에서도 반복됐다.


부다페스트의 진정한 봄은 이후 33년이 지난 1989년에야 가능해졌다. 혁명 당시 신정부의 수반이었던 너지의 시신은 복권되어 정식으로 장례식이 열렸고, 30여년만에 치러진 이 장례식에는 수만명의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운집했다. 수많은 시민들의 피로 쓰여진 혁명의 결실이 맺어지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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