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 천연물 '허포트리콘(herpotrichone)'의 인위적 생산이 가능해졌다. 허포트리콘은 뇌 속 염증을 억제, 신경세포를 보호하는 데 우수한 효과를 보여 치매, 파킨슨병 등 퇴행성 뇌 질환 치료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간 허포트리콘은 콩벌레와 공생하는 곰팡이에서만 극미량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화학반응을 거쳐 인위적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하면서, 앞으로는 허포트리콘을 이용한 차세대 신경퇴행성 질환 약물 개발이 가능해질 것으로 점쳐진다.
KAIST는 화학과 한순규 교수 연구팀이 천연 항신경염증 물질 '허포트리콘 A, B, C'를 세계 최초로 화학합성 하는 데 성공했다고 31일 밝혔다.
화학합성은 화학 반응으로 원하는 물질을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기존에 허포트리콘 천연물은 콩벌레의 공생균 '허포트리시아 sp. SF09'에서만 극미량으로 얻을 수 있었다. 이 물질은 5개 고리 구조(6각형 4개, 3각형 1개)인 6/6/6/6/3의 다중고리 구조를 가졌다.
이 물질은 뇌 염증반응을 억제하는 항신경염증 효과가 매우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에는 철분 매개 세포 사멸(ferroptosis)을 억제해 신경세포를 보호하는 작용기전까지 확인돼 뇌 질환 치료용 약물로써의 기대감이 커진 상황이다.
이를 이용하기 위해 연구팀은 곰팡이에서 이 물질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예상해 허포트리콘의 복잡한 구조를 연구실에서 화학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때 핵심이 된 것은 '딜스-알더(Diels-Alder) 반응'이라는 화학 반응이다. 이 반응은 마치 2개의 퍼즐 조각이 맞물려 하나의 고리를 만들 듯 탄소 기반의 파트너끼리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 육각 고리 구조를 형성하게 한다.
연구팀은 '수소결합'이라는 분자 사이의 약한 끌어당김 현상에도 주목했다. 또 수소결합을 섬세하게 설계하고 조절해 반응이 원하는 방향과 위치에서만 일어나도록 정교하게 유도함으로써 화학합성으로 허포트리콘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구 과정에서 연구팀은 기존에 핵심 수소 결합 없이 목표 천연물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거나, 엉뚱한 부산물만 생겼던 문제를 해결했다. 여기에 복잡한 구조의 허포트리콘 A, B, C를 모두 정확하게 합성할 수 있었다.
특히 허포트리콘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핵심 재료인 '델리트파이론(delitpyrone) C'와 '에폭시퀴놀 단량체(epoxyquinol monomer)' 분자가 어떤 구조를 가질 때 핵심 수소결합이 가능한지 정밀하게 분석했다.
이렇게 유도된 수소결합 덕분에 반응 분자가 정확한 위치로 다가가고 이상적인 전이상태를 거쳐 허포트리콘 C를 합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연구팀은 이 반응 원리를 허포트리콘 A와 B에도 적용해 성공적으로 이들 천연물을 합성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딜스-알더 반응 과정에서 자연계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분자 구조가 함께 만들어졌고, 이 중 일부는 우수한 약리 활성을 갖는 신규 천연물일 가능성이 높은 것을 확인했다. 이는 합성을 통해 천연물을 예측한다는 측면에서 연구에 의미를 더한다.
한순규 교수는 "이번 연구는 자연계의 희귀 천연물을 최초로 합성하고, 천연물의 생체모방 합성 원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연구"라며 "연구 결과는 앞으로 천연물 기반의 항신경염증 치료제 개발과 해당 천연물 군의 생합성 연구를 폭넓게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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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 연구에는 생명과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이유진 학생이 제1 저자로 참여했다. 연구 성과(논문)는 지난 16일 화학 분야 학술지 미국화학회지(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JACS)를 통해서도 소개됐다.
대전=정일웅 기자 jiw306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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