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언론통제 사건 다룬 '보도지침'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 언론탄압 폭로기 재구성
'나를 움직이는 힘은 어디서 오나' 물음서 시작
대학시절 친구들 신념 선택·결단 과정 보여줘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어느 날 이름 모를 곳에서 날아든 팩스. "이 단어는 꼭 써라, 저 사진은 절대 쓰지 마라!" 서른 두 살의 기자는 지침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후 지침을 어기고 문건들을 추적해 세상에 폭로하면서 일생의 위기를 맞는다. 그는 어떤 지침을 거스른 것일까?
1980년대 언론 통제 실화사건을 다룬 연극 '보도지침(작ㆍ연출 오세혁)'이 서울 대학로 무대에서 관객들과 조우했다. 이야기의 배경은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이다. 1986년 당시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가 '월간 말'에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한 사건을 재구성했다. 정치권력과 언론 탄압이라는 묵직한 주제. 하지만 뮤지컬ㆍ연극계 실력파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와 활력, 군데군데 익살스러운 요소들이 심각함을 덜어낸다.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주언 기자는 극중 '김주혁'으로 나온다. 월간 말을 세상에 공개한 김종배 편집장은 '김정배'로, 이들의 재판을 변호했던 한승헌 변호사는 '황승욱'이라는 인물로 무대에 오른다. 실존 인물을 새롭게 각색한 데 이어 허구의 인물들도 등장한다. 주혁ㆍ정배ㆍ승욱과 법 앞에서 맞서게 된 검사 '최돈결'이 가세한다. 이들 네 사람은 대학시절 같은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한 친구들이다. 여기에 작품 속 재판을 담당한 판사 '송원달'은 이들의 대학시절 선배이자 존경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와 여자는 직장동료와 학교 선배 등 여러 장면에 등장하며 조연 및 내레이터 역할을 한다.
무대는 옛 재판장. 장르상 법정극이다. 장면이 바뀌면 책상과 의자 등 도구를 옮겨 무대전환을 한다. 무대는 주인공들이 대립하는 원고와 피고석이 됐다가 연극 동아리방 시절로 회귀한다. 또한 치열한 논쟁이 펼쳐지는 광장도 됐다가 객석과 호흡하는 극장으로 돌아온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대학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 네 명. 졸업 후엔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던 이들이 보도지침 사건으로 첨예하게 대립한다.
작품은 뮤지컬 제작사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프로듀서ㆍ대표 장상용)가 만든 첫 번째 연극이다. 지난해 초연된 연극을 새롭게 다듬었다. 무대와 조명, 음악 등 모든 요소들을 간소화하고 대사에 집중했다.
실제 사건의 인물들을 재판장과 기자회견장에서 본 듯 대사 하나하나가 생생하다. "진실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우리는 세상에 공개한다!" "답하라! 당신들은 권력을 어떻게 차지했는가!"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헌법에 명시된 언론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진실을 담은 말은 힘이 있습니다" 등. 극 내내 방대한 대사가 펼쳐지지만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듯 사실적인 독백으로 지루함을 줄였다.
지난해 초연 당시 작품을 집필한 오세혁이 이번 재연에서 연출을 맡았다. 오세혁이 작품을 쓸 당시 가장 중요하게 여긴 물음은 '나를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였다. 국가와 언론이라는 시스템을 조명하기보단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신념에 따라 선택을 하는 과정, 그 결단의 길을 보여주고자 했다. 연출가는 작가노트에서 "보도지침 사건 당사자들의 최후진술이 그 어떤 연극의 독백보다 아름다웠다"면서 "그분들의 말을 무대 위로 가져오고 싶었다"고 했다. 또 "세상에 대한, 방향에 대한, 연극에 대한, 독백에 대한, 나에 대한 말들. 그 말들을 뜨거움과 차가움의 경계에서, 불량함과 진정성의 경계에서 거침없이 쏟아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극 마지막 재판이 끝난 뒤 제 갈 길로 흩어지는 인물들에게 재판장이 묻는다. "자네들은, 이제 어디로 갈 건가?" 각각 정의ㆍ진실ㆍ마음의 소리를 찾으러 가겠다고 답하는 주인공들. 관객들은 국가와 권력, 자유민주주의의 속성을 단순 비판하기보단 그 틀 안에서 어떤 신념과 가치를 선택해 각자의 미래로 나아갈 것인지 고민해볼 수 있다.
6월11일까지 서울 대학로 티오엠(TOM) 2관에서 상연한다. 7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배우 봉태규를 비롯해 서현철, 윤상화, 김경수, 고상호, 기세중, 최연동, 정인지 등이 출연한다.
◆'보도지침' 실화 엿보기= 보도지침(홍보조정지침)은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정권안보를 위해 매일 각 언론사에 은밀하게 시달한 지시 문건이다.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관계없이 사건이나 상황, 사태의 보도 여부는 물론 보도 방향과 보도 내용 및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 '가(可), 불가(不可), 절대불가' 지시를 내렸다. 보도 방향과 표현 방식, 사진 사용, 당국의 분석자료 처리방식 등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방송의 경우 9시 뉴스 큐시트를 정무수석실과 홍보조정실로 보내 뉴스의 크기와 배열을 사전 심의했다. 주로 민주화 운동, 대외 관계, 여론, 언론 등과 관련된 사안에 보도지침을 내렸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김주언은 보도지침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1985년 10월19일부터 1986년 8월8일까지 10개월 동안 시달된 584개 항의 보도지침 내용을 한국일보가 보관 중이던 자료철에서 복사해서 월간 말에 넘겨줬다. 월간 말은 1986년 9월6일 특집호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를 발간했다. 이어 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공동으로 명동성당에서 '보도지침 자료공개 기자회견을 하면서…'라는 성명서를 발표, 보도지침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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