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해변에서 혼자' 김민희와 홍상수 감독
배우-유부남 감독의 불륜 속죄·위로 신 자주 등장
자전적 영화 아니라지만 지워지지 않는 그들의 스토리
'스타니슬랍스키'식 연기한 김민희, 치료적인 카타르시스나 통찰 경험
체호프 '사랑에 관하여' 속 알료힌 고백으로 홍상수 사랑도 확인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더 이상 배우 김민희의 연기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 할리우드리포트는 "홍상수 감독의 장기인 사랑의 의미를 묻는 영화에서 김민희는 관객을 깨어있게 한다"고 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속 영희다. 연애의 끝을 받아들이는 여배우의 심정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우울해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천진난만하게 웃는데, 이 얼굴에서도 슬픔이 떠날 줄을 모른다.
김민희와 영희의 상황이 많이 닮아서 가능했던 표현으로 보인다. 그녀는 13일 유부남인 홍상수 감독과의 연인 관계를 인정했다. "만남을 귀하게 여기고, (서로를) 믿고 있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 저희에게 다가올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영희도 유부남 영화감독과 불륜에 빠졌다. 그러나 독일 함부르크 여행에서 이상기류를 느끼고, 강릉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사랑에 대해 고민한다.
홍상수 감독은 이번 작품이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냐는 질문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어차피 해석이 다 들어가기 마련이며, 끝까지 자전적인 작업은 하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보이는 디테일 때문에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서 그렇게 오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오해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진심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이는 디테일이 김민희의 연기에 상당 부분 영향을 줬으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김민희는 홍상수 감독과 처음 협업한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년)'를 촬영하면서부터 연기에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졌다. "캐릭터에 맞춰 변하거나 만들겠다는 생각보다 그런 만남에 충실하면 자연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녀와 영희의 만남은 수월했을 것이다. 단순히 처지가 비슷해서가 아니다. 홍상수 감독의 연기 지도는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주로 다룬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방식과 흡사하다. 정서를 통로로 연기에 접근하는 심리적이면서 자연주의적인 메소드를 강조한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연습 과정에 즉흥극을 도입해 텍스트를 분석하고 여기에 내포된 하위 텍스트와 동기, 정서, 행동 등을 찾아냈다. 글에 무의식의 이미지들을 자주 넣으면서 억눌린 에너지를 예술 형식으로 승화시키려고 했다.
홍상수 감독은 촬영 당일 아침에 대본을 쓴다. 촬영을 하면서 설정을 바꾸는 일도 흔하다. 배우에게 전날까지 대본을 외우거나 인물의 감정을 분석하는 과정이 있을 수 없다. 대신 정서를 통해 배우와 역할, 배우와 관객 사이에 동일 지점을 찾는다. 여기서 배우는 자기 경험 가운데서 극중 인물의 것과 유사한 정서를 찾아 연기를 하되 그런 감정을 처음으로 느끼는 듯 재현하게 된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극치료'의 저자 로버트 랜디는 이런 연출에 대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고 자신을 통해 타자를 사는 역설의 순간을 창조할 수 있다"고 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이 같은 연출에서 배우가 과거와 현재, 자신과 타자의 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극적 가상을 실제처럼 재현할 수 있고, 그것이 성공해야만 관객이 인물의 딜레마에 동일시된다고 확신했다. 이런 메소드로 훈련한 배우들은 치료적인 카타르시스나 통찰을 경험하곤 했지만 스타니슬랍스키에게는 예술적인 목표가 우선이었다. 연극치료는 그에 비해 예술적 표현을 장려하면서도 작업의 상위 목표는 치료에 고정시킨다.
베를린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김민희는 상처받은 마음까지 치유했을 것이다. 이번 영화에 세간의 지탄을 받는 불륜에 속죄하거나 지인들에게 위로받는 신 등이 매우 많이 배치됐다. 영희는 함부르크에서 산책을 하다가 불현 듯 홍상수의 아내를 연상케 하는 지영(서영화)을 향해 절을 한다. 강릉에서 지인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는 뜨거운 응원을 받는다. "가만히 내버려 두지, 왜 그렇게 난리들이야. 남이 지들끼리 좋아하는 걸 불륜이래? 잔인한 것들. 우리라도 잘해주자." 특히 천우(권해효)는 영희를 우연히 마주칠 때부터 불륜 때문에 외국으로 도피하듯 떠난 그녀의 사정을 가감 없이 입에 올린다. "너 재능 있어. 그런 식으로 일 그만 두는 거 아니야."
김민희에게 이번 영화를 통한 성취는 하나 더 있을 것이다. 홍상수 감독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확인이다. 영희는 해변에서 혼자 잠을 청하면서 만난 유부남 영화감독 상원(문성근)에게 책 한 권을 선물로 받는다. 체호프의 소설 '사랑에 관하여.' 상원은 한 구절을 직접 읽어준다. "저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제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사소하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고백하는 주체인 알료힌은 마음에 품었던 유부녀 안나 알렉세예브나를 허망하게 떠나보낸다. 홍 감독은 그와 상반된 길을 택했다.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사이"라고 했다. 세간의 부정적 반응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와 의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홍 감독을 잘 아는 혹자는 "기자회견까지 나와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라고 했다. 알료힌의 또 다른 고백에서 용기를 얻은 것은 아닐까. "그녀가 내게 시집을 온다 하더라도, 내가 그녀를 어디로, 어디로 데려갈 수 있을까? 내 삶이 아름답고 흥미로운 것이었다면, 예를 들어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는 투사거나 유명한 학자나 예술가였다면 그건 다른 문제겠지만, 하나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에서 그녀를 끌어내 똑같은, 어쩌면 더 일상적인 삶으로 데려가서 어쩌겠단 말인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