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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바꿔봐요]"내 새끼가 새끼를 낳았구나"를 아시나요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분 32초

'40년 외길 건설엔지니어'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주문


[이젠 바꿔봐요]"내 새끼가 새끼를 낳았구나"를 아시나요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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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어느 생명보험회사 광고문구는 이렇습니다. "내 새끼가 새끼를 낳는다고 고생했구나." 이 글의 제목은 이 문구에서 약간 변형한 것입니다. 광고문구는 엄마가 방금 아기를 낳은 딸에게 하는 말인데, 이걸 듣는 순간 ‘말이 더 필요 없구나’ 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어(언어)에는 이렇게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의 ‘풀꽃’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에는 한자나 영어가 없습니다. 한글만 깨치면 아기들도 읽을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이 시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의 크기와 깊이가 다를 겁니다.


평생 기술 단어에 익숙하던 제가 재작년에 ‘법률상의 관리인(법정관리인)’을 하면서 맨 먼저 닥친 어려움은 한자식 법률용어들이었습니다. “전대인이 대위변제한 후 구상청구함”이라 하면 번체(繁體)한자를 배운 분들은 글자의 훈(訓)으로 어렴풋이 뜻을 이해하시겠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앞뒤 문맥으로 단어의 뜻을 대충 짐작하고 넘어갑니다. 모든 법이 그렇듯이 건설에서 쓰는 시방서(Specification) 등 계약문서들도 반드시 그 목적과 각 단어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밝히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잘 못 해석해서 다툼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이게 완벽하다면 변호사들은 할 일이 없어질 겁니다. 사물을 제대로 정의하고 이해를 같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강의 후 학생들이나 청중들에게 “제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을 잘 안 합니다. 쑥스러워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단어의 뜻을 잘 모르기 때문인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냥 어렴풋이 짐작을 하면서 귀만 열어놓고 앉아 있는 거지요.


상품이나 가게의 이름에는 우리말, 한자, 영어, 제3국어를 마구 짜맞춰 만든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SNS시대에 들어와 언어의 오·남용은 더 심해져서 마치 생태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도 생깁니다. 게다가 젊은이들이 쓰는 단어들은 더욱 세대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생각의 차이 때문에 노땅들과 말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단어 때문에 말이 안 통한다면 이건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겁니다. 마치 한 사람은 한국말로, 상대방은 외국어로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호(記號 Sign)의 함정= 말과 글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 수단입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기호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나와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엄마’입니다. 입술을 떼면 그냥 나오는 소리인데, ‘엄마’ 하면 젖을 물려주니까 아기는 엄마라는 말이 젖을 먹을 수 있는 기호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기호는 약속입니다. 기호가 무너지면 기존 지식의 틀(Body of Knowledge)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말은 반드시 상대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대화의 맥을 짚어가면서 의사소통을 하는데, 인간의 인식이라는 게 불완전해서 말은 할수록 꼬이는 한계가 있습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고, 사랑의 표현법도 애인끼리 말 궁합이 맞아야 합니다. “당신은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도 있지만, “아, 나의 꽃이여!”라는 말을 들어야 가슴이 설레는 여자도 있습니다. 은유적 표현은 문학은 물론 종교에서도 많이 쓰지만, 이게 정치 마당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정치적 경쟁자가 “사람은 꽃이다”라 했다고 “사람이 어떻게 꽃이 되느냐”며 진실공방을 벌입니다.


요즈음 미꾸라지들이 애꿎게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기름바른 미꾸라지’나 ‘법꾸라지’가 나오기 전에도 ‘말꾸라지’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단어의 정의를 교묘히 비틀어 빠져나가는데 도가 트인 사람들이지요. “웃자고 한 소리에 죽자고 달려드나”라는 어느 분의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 분이 그냥 개그맨이었다면 웃고 넘어갈 말이었는데, 지금은 대중을 상대로 정치적 활동을 하는 ‘방송인’이기 때문에 시비가 커진 겁니다. 용모와 말투로 지도자와 사기꾼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비상한 말 재주로 남을 속이면 사기꾼이 되고, 대중의 피를 끓게 하면 선동가가 됩니다.


성철스님이 돌아가시면서 “한평생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 말을 놓고 듣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화두(話頭)는 스승이 제자에게 말머리를 주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인데 사실 답은 없다고 합니다. 즉, 답을 찾는 과정에서 기호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 실체를 찾아가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補修(repair), 報酬(pay), 保守(conservative)= 우리 말 ‘보수’를 한자로는 다양하게 쓸 수 있습니다. 차라리 영어로 하면 앞 두 단어의 뜻은 중학생이라도 알겠는데, 세 번째 것은 한자의 획수(劃數)는 적은 반면에 영어로도 매우 깊은 뜻이 있는 단어로 보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대선은 곧 다가온다는데, ‘진짜 보수’부터 ‘가짜 진보’까지 말장난 같은 잣대가 하도 헷갈려서 누구를 찍어야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건지 잠이 잘 안 오네요. 국가기관이나 무슨 재단 같은 곳에서 일하는 분들 줄 잘 못 섰다가는 다음 정부에서 마스크 쓰고 굴비 엮이듯 잡혀갈 수도 있습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 때 무고한 양민들이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어느 소설에서는 이 상황을 ‘낮에 태극기 들고 나갔다가 밤에 공비에게 맞아 죽고, 밤에는 공비에게 밥해주다 다음 날 국군에게 총살당하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나라의 정체성을 놓고 정치 지도자라는 분들이 내세우는 주장을 보면, 단어의 홍수 속에서 어느 한 쪽을 강요당하는 느낌이 꼭 그렇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말은 앞뒤 글 맥이 아니라 단어 자체로 자기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 식사했어요? > 밥 먹었니?’처럼 상대방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존비법을 갖고 있고, ‘새파랗다 >파랗다 > 푸르스름하다’처럼 미세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들도 갖고 있습니다.


개혁보수신당이 생겼습니다. 공안검사출신 총리에게 부역 아니냐고 따지던 분도 그 당으로 가셨더군요. 부역(賦役: 나랏일에 대가 없이 하는 노역)인지 부역(附逆: 적에 빌붙다)인지 헷갈리는데, 당일 말의 앞뒤로 보건대는 부역(賦役)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게 국민들에게 부역(附逆)으로 들렸다면 큰 일 아닙니까.


그런데 이 당의 창당 선언문을 보니 보수라는 단어에 붙어있는 좋은 뜻은 다 퍼 담아 쓴 것 같습니다. ‘다 하겠다’는 말은 진정성이 없어 보입니다. 면접시험을 이렇게 보면 틀림없이 떨어집니다. 아무리 급하고 경황이 없어도 허둥대지 말고 정신 가다듬어 국민 누구라도 쉽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좋은 우리말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보수라는 단어는 안 들어가도 좋으니 진심이 담긴 한 마디를 듣고 싶습니다. 면접관(유권자)으로서 수험생(개혁보수신당)에게 묻겠습니다. 자기소개서(창당 선언문) 잘 읽었습니다. 정말 뭘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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