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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바꿔봐요]국회의원(Law-maker)과 설계자(Des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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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외길 건설엔지니어'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주문


[이젠 바꿔봐요]국회의원(Law-maker)과 설계자(Designer)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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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권분립(三權分立)과 시스템 생애주기(生涯週期 Life Cycle)= 국가의 권력은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으로 나눠집니다. 건설사업을 생애주기 기법에 따라 나눠볼 경우 설계, 시공, 운영으로 나뉩니다. 삼권분립이 공간적, 병렬적 개념이라면, 생애주기는 시간적, 직렬적 개념으로 느껴집니다. 비교하기 어려운 듯 하지만 둘 간에는 상당한 공통점과 연결성이 있습니다. 입법은 설계와 비슷하고, 행정은 시공에 견줄 수 있습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국민의 세금으로 작동하므로 시스템의 주인은 당연히 국민들이어야 합니다. 아울러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설계(입법)되고, 조직화되고,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법대로 운영되는지 살펴보고 판정해 주는 것도 국가 기능의 중요한 한 축입니다.

[이젠 바꿔봐요]국회의원(Law-maker)과 설계자(Designer)


국가의 구성은 법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겁니다. 대한민국의 법은 국민들의 자유의사(free will)로 선출된 대표들이 모여서 만든 국민들 사이의 약속입니다. '자유(自由~스스로 말미암다)'라는 단어에는 자기가 한 행위에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국회에서 잘 못 만든 법 때문에 오는 고통이나 손실을 국민들이 나눌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건설사업의 설계를 잘 못한 설계자는 어떤 형태로든 제재를 받습니다. 하지만 법을 잘 못 만든 국회의원을 제재할 유일한 방법은 다음 선거에서 표를 주지 않는 것뿐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것은 유권자들의 기억력이 좋아야 가능합니다.


◆법령(法令)과 설계=시스템은 설계로부터 시작됩니다. 설계에 들어가는 돈은 총 생애주기비용의 5% 내외이지만, 시스템상의 문제로 발생하는 손실의 80% 이상은 설계 때문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만큼 설계가 전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합니다. 통상적으로 설계는 개념설계, 기본설계, 상세설계, 현장제도(現場製圖 Shop Drawing)의 단계를 거칩니다. 개념설계는 사업초기단계에 경험이 많은 고수(高手)들이 지휘봉을 잡게 되는데, 법체계로 보면 헌법의 위치쯤 될 것이고, 현장제도는 행정부처의 시행령쯤 될 겁니다.


국회의원은 나랏일 하라고 지역구에서 뽑아 보낸 대표들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중에는 국회에서 해야 할 일과 구의회(區議會)에서 하는 일을 가리지 못하는 분들이 꽤 계시는 것 같습니다. 국회예산심의 철이 되면 지역민원성 쪽지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동네 네거리 눈에 잘 띄는 곳에는 ‘우리 구에 예산 00억원이 배정되었다’는 자랑스런(?) 전과를 알리는 현수막이 심심치 않게 걸립니다.


기본설계하는 기술자쯤 되면 현장제도는 수준 낮아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로기술자가 자기 소유의 땅값이 올라가도록 도로노선을 설계한다면 국회에서 가만히 안 있을겁니다.


건설회사들이 지난 정부 시절 입찰 전에 가격을 서로 맞춰봤다고 한참 혼이 났습니다. 시장질서를 어지럽혔다는 거지요. 그런데 국회에서는 ‘네 법 통과시켜줄테니 내 법도 통과시켜달라’는 행태를 협상력이라 부르던데, 제 눈에는 시장질서보다 더한 국가질서를 어지럽히는 걸로 보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일반인들은 건설이라고 하면 땅을 파는 작업자들을 연상하지만, 작업자는 설계자가 만든 설계서에 따라 하는 것일 뿐입니다. 땅을 파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설계도는 눈에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개념설계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쟁도 총을 들고 전투를 하는 군인들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는 전략, 전술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좌우됩니다. 전략의 위에는 전쟁을 결정하는 국가 최고권자의 철학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전쟁을 선포할 수 있고, 국회는 동의권을 갖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님들이 이 개념을 모르실 리 없을텐데, 이 분들의 언행은 일선 전투 수준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마치 철학적 깊이가 있는 것처럼 포장하여 국민들을 자극합니다. 생중계되는 국정감사나 청문회에서는 말투가 더 거칠어집니다. 문제의 핵심을 찌르거나, 나라의 미래를 그리는 철학이 있는 그런 질문이 아니라 신문기사나 투서를 근거로 면박을 주거나 심지어는 인격 모독적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증인의 답은 잘 듣지 않더군요.


설계자가 땅을 파는 현장에서 설계 개념을 읽어내듯이, 국회의원은 광화문의 함성으로부터 국가가 나아가야 할 철학을 읽어내야 합니다. 길거리의 ‘ㅇㅇ연대’도 아니고 적어도 국회의원이라면 함성에 올라타려 하면 안 됩니다.


◆청문회(Hearing)와 재판(Trial)=사업의 생애주기기법에는 피드백(Feedback)이란 절차가 있습니다. 문제점이나 개선점이 있으면 앞 단계로 돌아가서 이를 반영하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유능하고 성실한 설계자는 자기가 설계한 것이 현장에서 문제가 없는지 늘 살피고, 더 좋은 안을 다음 설계에 반영하는 노력을 합니다. 짧은 소견이지만, 국회는 법을 만드는 곳이므로 국회 청문회의 기본 개념은 좋은 법을 만들기 위한 제도적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문회는 재판과 달리 격식이 덜하다는데, 한마디로 ‘듣는 모임’입니다. 그런데 TV를 보면 검사만 주욱 앉아있고 변호사는 없는 공개형사재판 같습니다. 수사기관들이 진실을 못 찾거나 안 찾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들이 나서서 진실을 밝힌다는 결연함마저 느껴집니다. 민간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검찰은 하는 일이 그렇다 치더라도) 한꺼번에 국회에 불려 나가서 전 세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죄인처럼 심문을 당하는 것을 보는 심정은 참담합니다. 청문회는 공개를 원칙으로 한다지만, 기업 비리 규명을 실시간으로 공개해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비윤리적 기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입니다. 윤리규정이 엄격한 선진국에서는 매우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수출로 먹고 사는 국민들의 대표라는 분들이라면 이런 청문회는 비공개로 하자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중에 재판에서 혐의가 없다고 결론이 난다면, 땅에 떨어진 기업 이미지는 누가 어떻게 보상해 주나요.


질문할 내용은 미리 서면으로 배부하고, 당일 질문할 것이 있으면 위원장에게 전달하여 질문자를 밝히지 않고 위원장이 질문하고, 공개 여부는 답변자의 동의를 구하도록 하면 안될까요.


◆국회의원의 모습이 지역 유권자의 모습입니다=격(格)이 있는 사람에게는 ‘됨됨이’라는 단어를 쓰고, 반대의 경우는 ‘꼬락서니’라고 합니다. 된장에 ×을 섞으면 ×밖에 안 됩니다.


국회의 격은 각 지역에서 뽑은 대표들의 격이 모아진 것이지만, 한두 명 국회의원의 잘못된 언행일지라도 국민들의 눈에는 국회 전체의 격으로 보이게 됩니다. 또 국회의원의 격은 결국 우리들 유권자 각자의 격입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 ‘우리 동네에 쓸 예산 따오라’든지, ‘속 시원하게 쌍스럽고 모욕적 말도 좀 해달라’고 찍어주진 않았을 겁니다. 국민들을 길거리로 나서게 한 책임은 다 어디로 보내고, ‘촛불민심을 읽었다’는 등의 비장하기까지 한 정치인의 모습은 더 이상 안 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안타깝지만 국회가 이 나라의 장래를 설계하는 곳이라는 기대는 당분간 접어두고, 지금부터 어떻게 해 나가는지 잘 보려 합니다. 유권자들은 다음 선거에서 ‘꼬락서니 지역구’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지역구 대표의 언행을 잘 기록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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