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
도종환 '접시꽃 당신' 중에서
■ 시인 도종환 읽기(5) = 대학 시절 끝무렵의 여인은, 사랑을 고백하고 있던 내게 말없이 이 시를 건네주었다. 그때 나는 이 시를 받고도 이것이 무슨 내용인지 읽어내지 못했다. 아침이면 왜 머리맡에 흔적없이 머리칼이 빠지는지,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이 왜 나오는지, 왜 갑작스럽게 장기기증을 권하는지 그땐 눈여겨 보지 않았다. 암 투병하는 아내에게 쓴 이 편지 하나는, 우리 시대의, 절망에 대한 깨끗하고 오롯한 순정의 표상이었다. 죽어가는 사랑 앞에서, 불안과 고통을 감내하며 담담히 말하는 도종환의 저 말들은, 지금 다시 내게 그 젊었던 사랑이 되쏟아내는 말들이 되어, 나를 서럽게 사로잡는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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