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한발 내디뎌
행동에 따른 결과 따져봐야
2024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은 지난 7일(현지시간) 스웨덴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기념 강연을 했다. 자신의 소설 다섯 편을 언급하며 해당 작품을 쓰게 된 배경과 작품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강연에서 유독 시간에 대한 언급이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그러니까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그러다 망월동 묘지에 찾아간 것은 같은 해 12월’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1979년 4월의 아이는 썼다.’
한강은 2018년 출간한 소설 ‘흰’의 서문에서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고 썼다. 이어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를 언급했다.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 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에 서 있기에 한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위태로움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현재의 날카로운 시간에 대한 감각이 한강의 역사 의식의 바탕이 아닐까. 우리는 항상 시간의 날카로운 모서리 끝에 서 있기에 늘 위태로운 존재들이고, 따라서 현재의 나의 사고와 행동이 향후 어떤 결과를 낳을지 항상 신중하게 따지고 고민해야 한다. 그런 역사의식에서 한강은 5·18과 4·3을 다룬 소설을 썼을 것이다.
5·18은 한강과 운명처럼 엮인 듯하다. ‘빛과 실’에서 언급했듯 한강의 가족이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를 온 지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광주에서 5·18이 발생했다.
또한 한강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있기 불과 1주일 전에는 한국에서 45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1979년 10·26 이후 첫 비상계엄이었다. 10·26이 12·12 군사반란과 5·18에까지 이어지기에 한강은 인생 최고의 순간을 앞두고 또다시 운명처럼 광주와 엮이고 말았다. 거의 대부분 한국인들은 당황스러운 비상계엄 선언을 보며 한강이 쓴 ‘소년이 온다’의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민주화를 이루고 21세기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한국에서 후진적인 비상계엄은 상상할 수도 없는 충격이었다.
5·18 소설을 쓰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이 수상을 앞두고 5·18이 떠오르는 비상계엄을 맞닥뜨린 현실은 꽤 역설적이다. 그 상상할 수 없었던 역설적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불과 6시간 만에 철회할 비상계엄을 왜 선포했을까. 비상계엄 선포 자체가 이해할 수 없기에 그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대통령에게는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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