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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수 복지부 차관 "2000명 조정 없다…의사 없으면 전세기 내서 치료"

수정 2024.03.18 06:58입력 2024.03.17 20:38

"교수들 집단행동 선언, 똑같은 패턴
의료계 집단행동 문화 고리 끊어야"

박민수 보건복지부 차관이 17일 YTN 방송에 출연해 의대 교수들의 집단 사직 움직임에 대해 '대단한 겁박'이라며 "의료계 집단행동 문화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밝혔다.


박 차관은 전국 의과대학 교수 비상대책위원회가 전날 '정부가 2000명 증원을 먼저 풀어야 한다'고 한 것과 관련해 "2000명 증원은 절대 조정할 수 없다"고 못 박으며 "(의대) 교육의 질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교수들이 떠난 뒤 의료현장을 걱정하라"고 했다. 그는 "의대 증원 없이 수가를 올리면 건보료가 3~4배 올라갈 것"이라며 "집단행동으로 현장에 의사가 한 명도 남지 않으면 전세기를 내서라도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했다.


박 차관은 2000명 증원 방침에 대해 "절대 조정할 수 없다"며 "오랜 기간 논의하고 과학적 근거를 통해 결정된 숫자까지 힘으로 뒤로 물리게 하는 것이 의료계 문제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의사들의 주장대로) 증원 없이 수가(건강보험 재정이 병의원 등에 지불하는 의료행위의 대가) 인상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건강보험료가 3~4배 이상 올라갈 것"이라며 "국민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정책 구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교수들까지 사직서를 내고, 듣지 않으면 집단행동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라며 "국민에 대한 대단한 겁박"이라고 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차관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전국의대교수 비대위는 지난 15일 밤 20개 의대가 참여한 가운데 회의를 연 뒤 16개 의대 교수들이 오는 25일 사직서를 제출한다고 발표했다. 비대위 방재승 위원장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제일 먼저 '2000명 증원'을 풀어주셔야 합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의료 파국을 막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 차관은 "교수들은 제자들이 처분을 받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는데, 이건 법치에 대한 도전적인 발언"이라며 "정부한테만 2000명을 풀라는데 전공의들이 나가 있는 상태가 불법상태인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수들이 대폭 증원에 따른 의대 교육의 질 저하를 우려하는 것에 대해 "교육의 질 문제는 투자 확대를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며 "오히려 (교수들이) 의료현장을 떠나겠다(고 하고), (전공의가) 의료 현장을 떠난 상태가 더 문제다. 교육의 질을 따질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박 차관은 과거 의료정책 추진이 무산된 상황을 언급하며 "이번에는 다르게 대응하겠다"고 했다. 그는 "(전공의) 다음 순서로 교수들이 제자들을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집단행동 선언을 하는 것은 (과거와) 아주 똑같은 패턴"이라며 "이런 잘못된 의료계의 집단행동 문화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번에는 다르게 대응하고자 한다"고 했다.


박 차관은 전공의에 대한 면허정지 행정처분과 관련해서는 "6000명 가까이 되는 전공의에 (행정처분) 사전통지가 이뤄졌고 100명이 약간 안 되는 숫자가 수령을 했다"며 "기간 내에 의사표시가 없으면 처분이 가능한 상태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기본적으로 3개월 면허정지 처분이 기본이기 때문에 3개월 면허정지가 되면 기한 내에 전공의 과정을 마치기가 어렵다. 최소 1년에서, 2년 이렇게 늦어질 수 있다"며 "병원들이 하루에 적게는 10억원에서 20억원까지 적자가 난다는데, 이 부분들에 대한 민사소송까지 생각하면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차관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박 차관은 이날 저녁 채널A에 출연해서는 "모든 의사가 다 현장을 떠나버려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국민의 생명을 지킬 것"이라며 "대한민국의 의사가 하나도 현장에 남아 있지 않는다면 전세기를 내서라도 환자를 태워 날라서 치료하겠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에 대해서는 (의사들이) 다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의대 교수들의 집단행동 움직임에 대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정부의 정책을 무릎 꿇리겠다는 태도로, 국민과 법치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판했으며, 집단행동 중인 전공의에 대해서는 "미성년자도 아니고 다들 성인이니 본인이 한 행동에 대해 분명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서 그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개원의들 사이에서 야간·주말 진료 축소 움직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과거의 사례를 봐도 계속해서 휴진하는 사례는 잘 없다"며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는 않고 있고, (진료 축소가) 실현되지 않도록 설득하고 설명하겠다"고 했다.




최서윤 기자 s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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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무라야마 지준은 왜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인식했나(中)
수정 2024.03.17 20:57입력 2024.03.17 14:04

영화 '파묘' 속 여우 무라야마 준지 모티브
1919년부터 22년간 조선총독부 촉탁 활동
묘지 풍수, 자손의 현실적 번영 목적으로 해석
심전개발 기초작업 참여…실제 효과는 미지수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시리즈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도깨비불·여우는 과거 풍년을 예고했다(上)>에 이어



*무라야마 지준은 조선총독부 촉탁(특수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이었다. 1919년부터 1941년까지 조선에 체류하며 조선 민간신앙과 향토 신사를 조사·정리했다. 일련의 보고서도 내놓았다. 자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한국 민속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아 가치가 적잖게 있다고 평가된다. 가장 유명한 자료는 '조선의 민간신앙 4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의 귀신', '조선의 풍수', '조선의 무격', '조선의 점복과 예언'이다.


*무라야마는 1891년 니가타현 가리와군 호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일련종(일본 불교 12대 종파 가운데 하나) 묘코지(묘광사)로 들어가 주지인 무라야마 지젠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일종의 제국대학 예비학교인 제일고등중학교를 다녔으며 스물여덟 살이던 1919년 7월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사회학 전공)를 졸업했다. 그는 그해 조석총독부로부터 위촉받아 조선으로 건너왔다. 구관제도 조사사업 가운데 '조선 사회 사정 조사'를 맡았다. 조선총독부 촉탁이 되기 전 대구에서 경찰서장을 역임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측근인 아사쿠라 도시오 등은 그런 경력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무라야마는 부락제, 귀신, 무속, 점복, 풍수, 안택, 기우 등 조선의 민간신앙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입장에서 조선인과 조선 사회에 대한 조사를 수행했다. 작성한 보고서는 모두 열세 권에 이른다. 같은 촉탁이던 젠쇼 에이스케와 함께 참여한 조사 자료를 포함하면 더 많다고 추정된다. 그는 사립불교학교, 경성공립상업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37년 8월부터 1938년 10월까지는 잡지 '조선'에서 편집을 맡았다. 1941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장학회에서 주사로 근무했다. 1945년 스승 무라야마 지젠이 죽자 묘코지 31대 주지가 됐다. 무라야마는 1958년 건강이 악화한 부인의 요청에 따라 도쿄로 거처를 옮겼다. 승적에 오르면서 학계를 떠났으나 평생에 걸쳐 독서에 매진했다. 그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말수가 극히 적었는데 주로 남의 말을 경청했다고 전해진다. 정형적인 학자 스타일이었다고 추정된다. 한문에 관한 학식이 깊었다는 점은 고문헌을 인용해 작성한 조사 자료에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무라야마는 1968년 일흔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다.



*무라야마가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활동한 기간은 1919년부터 1941년까지 약 22년이다. 일제 식민 통치 당국의 필요에 따라 조선의 민속 등을 조사했다. 그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조사 자료의 비중이 약해지자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무라야마가 조선으로 건너온 1919년은 3·1 운동이 벌어진 해다. 조선 민중의 저항에 놀란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고 기만적인 유화정책과 민족분열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해 9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이는 해군 대장 사이토 마코토. '문화의 창달과 민력의 충실'을 시정방침으로 삼았다. 총독무관제와 헌병경찰제를 폐지했다. 보통경찰제를 실시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 제한을 해제하는 등 몇몇 개량적 정책을 폈다. 본질은 친일파를 육성해 지배체제 안정을 기하려는 민족분열정책이었다. 예컨대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꾼 건 경찰 업무와 군사 업무를 나눈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반일 운동을 효과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강화했다.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1925)을 제정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일제강점기 민간신앙은 새로운 역사 환경에 조응해 여러 측면에서 변화했다. 주요한 요인은 무속 규제 및 단속,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난 미신 타파 운동, 기독교 확산, 조선왕조 멸망에 따른 파장, 식민지 근대화의 문화변동 등이다. 당시 무속을 위시한 민간신앙은 식민지 당국은 물론 기독교 세력, 민족진영 좌·우파, 일반 지식인 및 관련 사회 단체·기관 등으로부터 공격받았다.


*일본 정부는 메이지 유신 뒤 당대 민간에 뿌리내리고 있던 민간신앙을 음사로 규정하고 탄압한 전례가 있다. 특히 1870년대부터 전개한 신사 일제 조사는 민간신앙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다양한 신들을 하나의 신으로 단일화했다. 이러한 경험은 식민지 조선에 그대로 이식됐다.



*조선총독부는 1919년 식민지 통치정책 자료로써 사회 실태를 연구할 필요를 느꼈다. 무라야마에게 5개년 조사계획을 맡겼다. 이른바 '조선 사회 사정 조사'다. 조사 항목은 크게 세 가지였다. 기초조사(토지·생물·인종)와 사회·협동·경제·사상·일상생활·위생·치죄, 사회문제다. 조사는 1923년까지 진행됐다. 관동대지진으로 크게 위축되면서 중단됐다.


*무라야마의 조선 민간신앙에 대한 조사·정리 작업은 국민정신을 진작시키겠다는 다이쇼 천황의 의지가 조선총독부에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라야마가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면서 제출한 논문 제목이 '일본 국민성의 발달'이었다는 점은 당시 그가 일본의 정치·사회적 지향을 잘 읽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조선총독부 촉탁으로서 조선의 사회 사정 조사를 맡은 배경일 수 있다.


*무라야마는 초기에 조선의 사상과 사회운동을 조사했다. 그 뒤 서민의 의식주, 귀신이나 풍수와 관련한 민속종교, 전통 놀이 등과 관련한 조사 자료를 다수 남겼다. 1923년 '조선사 강좌'에 '풍수에 대하여'를 게재할 즈음부터 풍속 조사는 한층 민속학적 색깔을 보인다.


*무라야마에게 조선 민간신앙은 자연적 신앙을 바탕으로 민간에 통용되는 것이었다. 그는 줄기로 조령(조상의 영혼) 숭배를 주목했다. 그 존재가 영구히 가능한 이유에 대해서는 생활상의 요구, 특히 감정적 희망이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봤다.



*무라야마는 조선에서 자연물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정령이 있다고 믿어 신앙의 대상이 된다고 분석했다. 민중의 인생관이 자기 이외의 힘, 불가사의한 힘인 정령에 의해 그 생활이 좌우된다는 신앙 관념에 입각해 무격(무당과 박수)들이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봤다. 이 같은 시각에서 간행된 책이 바로 '조선의 귀신'이다.


*귀신은 고대 중국인의 원시적 신의 개념이 그대로 전승된 개념이다. '논어'에서 '귀'는 죽은 사람의 혼령을 지칭한다. '신'은 자연신을 포괄해 신명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조들은 귀신을 음양설로 해석했다. 천지간 기를 음과 양으로 나눴는데, 여기서 음은 백이 되고 양은 혼이 된다고 믿었다. 이 혼에서 승천하는 것은 양으로 신이 되며, 내리는 것은 음으로 귀가 된다고 봤다. 신은 양의 영, 귀는 음의 영으로 본 셈이다. 따라서 산 사람의 영혼은 생령으로 귀신이 될 수 없으며, 죽은 사람의 영혼은 귀와 신이 된다고 판단했다.


*조선에서 인식한 현세와 내세 또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죽음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너무 빨리 죽으면 급살(갑자기 닥쳐오는 재액)을 맞았다고 생각했다.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병을 앓다가 자손들의 임종 속에 죽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봤다. 아울러 죽은 사람은 자손들에 의해 제사를 받는 가운데 차츰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며, 나중에 조상으로 승격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형태의 일정한 과정이 전형적이고 이상적이라지만 실제로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통과의례를 마치지 못한 이의 죽음이 대표적 예다. 일찍 죽는 조사나 성인이기는 하지만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미혼자의 경우 원한이 강한 원혼이 된다고 봤다.



*무라야마는 조선 민간에서 인식하는 귀신 관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귀신에는 착한 것도 있지만 악한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형태는 없으나 인위적 행위와 초인적 행위를 모두 할 수 있다. 그것들은 우주에 많이 존재하며 사람과 빈번하게 관계를 형성한다. 사람과의 교섭은 선한 것보다 악한 것이 많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귀신이라고 하면 대개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무라야마는 신령과 잡귀, 잡신을 별다른 기준 없이 단순하게 열거해 설명했다. "귀신이 인간의 혐기적 대상이 되는 데 반해 신은 인간에게 의뢰 대상이다. 귀신이 재앙의 발원이라면 신은 행복의 부여자라는 것이 조선 시대 귀와 신의 대립적 신앙이다. 신명이 자주 귀신을 사역하고 귀신에게 명령하며 목숨까지 관장하는 절대 권력을 가진다는 신앙도 있다. 귀가 신의 통솔 아래 지배당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귀의 재앙에서 벗어나려면 귀를 물리치는 것과 함께 그 통솔자이며 지배자인 신에게 빌어 귀신을 단속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무당이 병을 치료할 때 반드시 강신의 행위를 한 뒤 병의 근원인 귀신을 물리치고자 하는 것도 모두 이 신이 제재력과 지배력을 가지고 생사를 조절한다는 인식에서 생겨난 신앙이다."


*무라야마에게 묘지 풍수란 자손의 현실적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조상에게 안주할 땅을 바치고 이로써 그 영을 영원히 수습하려는 1차원적 추효(죽은 부모나 조상 등의 명복을 빌고 공양하여 효도를 다함) 관념보다 오히려 자손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조상 분묘를 좋은 곳에 마련한다는 이차적이고 이기적이며 현실적인 관념에 바탕을 두고 지탱된다고 봤다.



*조상의 유해를 길지에 안장하는 행위는 '효' 사상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가장 그런 성격이 돋보이는 행위는 유교의 제사다. '효'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된다. 풍수신앙은 자손들이 조상 덕을 직접적으로 받고자 하는 현세 구복적 성격이 더 강하다.


*무라야마는 조선 묘지 풍수의 특징으로 다섯 가지를 거론했다. 첫째는 조선의 풍수가 중국에서 전해졌다는 점, 둘째는 풍수란 땅의 생기를 타는 것을 중요시하기에 자연스럽게 묘지 풍수가 중요시됐다는 점이다. 셋째는 묘지 풍수의 보급에 불교의 영향이 컸다는 점, 넷째는 조선인의 신앙 가운데 죽은 사람의 뼈가 산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신앙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풍수가 묘지 신앙으로 빨리 수용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조산의 무덤이 후손에 이롭다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고 풍수를 방편(그때그때 편하고 쉽게 이용하는 수단과 방법)화했다고 봤다.


*무라야마는 방대한 사진을 수집했고, 그중에서 적절한 것들을 추려 조사 자료로 게재했다. 유족이 소유하던 앨범은 게이오대학 동양사학과 이토 세이지에게 기증됐다. 이토는 적당하게 사례하고 보관하다가 교린대학에서 정년퇴직을 맞이할 무렵 노무라 신이치에게 빠짐없이 넘겨줬다. 사진 대다수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것으로 추정된다.


*무라야마가 활동한 시기에 한반도는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이름의 농지 수탈로 자작농이 광범위하게 붕괴했다. 농촌 갈등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인지 사진 속 사람들의 표정이나 제의 현장은 대체로 경직돼 있다. 물론 촬영 환경이나 찍는 이의 자세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에는 지금은 없어진 수많은 민속이 담겨 있다. 말라리아를 치료하려고 발바닥에 적은 부모 이름, 방상씨(조선 왕실 관례, 흉례, 나례에 사용되던 가면)가 등장하는 장례, 각종 질병에 대응하는 공물·시설·정월에 액을 털기 위해 만든 인형 제웅, 영등할미(음력 2월 초하룻날인 영등날에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할머니)에게 지내는 제사 등이다.


*예부터 조선에서는 사자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하늘에 있는 영혼, 즉 귀가 지상에 남겨진 자신의 유골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봤다. 유골이 잘 안치됐을 때는 영혼이 편안히 잠들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원귀가 되고 또 여귀(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가 되어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린다고 본 셈이다. 무라야마는 조선에서 묘지 풍수가 발달하게 된 배경을 이러한 귀신 신앙에서 찾고자 했다.


*무라야마는 혈족 중심의 사회성과 가족 중심 제도의 특성에 기인해 조선 문화의 여러 양상이 나타나는데, 그런 특색이 가장 잘 나타나는 사례가 묘지 풍수라고 봤다. “자손 번식, 일가 번영 등을 희망하는 행위는 조선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민속에서도 이런 종류의 욕구가 보이지만, 조상과 부모의 유해를 길지에 매장함으로써 그 목적을 성취하려는 집념만큼은 타문화와 다른 조선 문화만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원래 자기 혈족 이외의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조선인의 사회적 특성에 유래하는 것이다. 더불어 부모 또는 가장 지위에 있는 존속에 의해 생활 보증이 주어지는 조선 가족제도의 특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혈족 중심의 사회성과 가장 중심의 가족제도는 조선의 오랜 역사를 일관하는 특색이다. 조선 문화의 여러 양상은 실로 이러한 사회적 특질의 뿌리에서 싹이 텄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는 어느 명산, 명당이건 그곳의 묘를 쓰면 그 자손은 복을 받으나 마을 사람들은 화를 입는다는 신앙이 있었다. 자기 일족의 번영을 위해 누군가가 암장하게 되면 그 지역에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암장으로 부정을 타서 산신이 노여워한다고 봤다. 마을은 산신의 노여움으로 화(가뭄)를 입게 되지만, 암장한 일족은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날이 가물면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암장한 묘를 파내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무라야마는 이렇게 자기 가족, 일족만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서슴지 않는 조선인이 있는 이유가 조선의 가족 중심 가족제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930년 8월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무격 수는 1만2380명에 달했다. 인구 1000명당 무려 0.65명의 비율이었다.


*무속신앙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무(巫)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죽은 조상이 후손들에게 현신해 이야기하고, 신이 인간의 물음에 답하거나 인간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는 무라는 중계인 또는 영매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무는 신병이나 종교체험을 통해 신의 영력을 획득하고 신과 교통하는 자를 가리킨다. 하늘과의 교통은 한국 무당의 오랜 전통적 역할이었다.


*무라야마가 민간신앙 4부작으로 인식한 조선 민간신앙 체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조선에서는 귀신 신앙이 사상의 근간이며, 조선의 문화는 그 영향을 받는다. 둘째, 풍수를 살펴 조상을 좋은 곳, 즉 명당에 모셔야 한다. 셋째, 여차하면 매사를 무격에 의탁해야 한다.



*조선 민간에는 생물과 무생물의 정령이 사람들과 교섭한다는 귀신 신앙이 퍼져 있었다. 전염병이나 온갖 재앙을 전부 이 귀신의 소행으로 보아 귀신의 신의를 점복으로 알고자 했다. 조선 사람들은 귀신이 함부로 남의 집에 붙어 재앙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자신이 의탁해 사는 대가로 그 집의 복을 증진하는 일도 있다고 믿었다. 귀신이 들어와 길흉을 알리고 또 귀신을 불러들임으로써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본 사상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 민간에선 조상을 명당에 모시면 조상신 덕분에 번영하고 행복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손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조상을 수습한 곳이 길지가 아니므로 반드시 이장해야 한다고 봤다. 이렇게 이장할 때나 삶이 여의치 못할 때는 무격에 의탁해 귀신으로부터의 재화에서 벗어나곤 했다. 귀신이 신내림(빙의)이라는 형태로 무격의 몸이나 입을 빌어 자기 뜻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무라야마는 당시 통치자나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처럼 조선을 미신을 믿는 미개한 나라 정도로 인식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기술에서 확인된다. "조선 민중의 생활사상에는 스스로 땀 흘려 노력해 생활의 전개를 꾀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힘과 기회를 이용해 자기 생활의 약진을 기대하는 점이 있다. 생활고의 해탈에 대해서는 현상만이라도 타파되면 장래는 어떻게 되든 관계없다는 찰나 관념이 있다."


*무라야마는 미신으로 취급받던 조선 민간신앙을 저급하게 보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민간신앙은 유일한 대중 사상이며 그 기본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일부의 고급 사상이나 신앙 측에서 보면 실로 ‘미신’으로 멸시받을 정도로 저급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원래 대중 사상이 되는 것은 일부 고급한 것으로부터 보면 저급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것이 당연하다. 사상이라는 것이 대중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고급 상태에서는 결코 불가능하여 유지무지를 통해 유지되려면 형세가 저급 시 되는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라야마의 조선 인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우선 그는 조선의 무격이 원신을 모시고, 원령을 달래는 것을 그 주요한 기능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전통 민간신앙에서의 무격은 선신과 악신을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모셨다. 열두거리라 불리는 굿에는 삼신, 성주, 제석, 대감 등 사람들을 보호하는 선신들을 모셨는가 하면, 한편으로 사람들을 위해하는 객귀 등 악신들을 함께 모셨다. 우리 조상들은 풍요와 건강, 행복 등의 복을 빌 때 천지신명이나 수호신, 조상신 등 선신에게 소원을 빌면서도, 한편으로는 질병이나 재앙을 예방하려는 뜻에서 악신에게도 기원했던 셈이다. 현대 일본에도 악신은 존재하며 그것들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 믾속사회 속에 분포하는 신들 가운데 악신으로 자리매김한 대표적 사례는 행역신과 액병신이 있다. 이 악신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진송양재의 대상이 된다.


*조선에서 조상신을 모신다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온 자연과 초자연에 대한 외경심의 한 표현이었다. 무라야마는 문명 진화론적 입장에서 일본은 문명, 조선은 야만 혹은 미개라는 양분적 사고 아래 조선 민간신앙을 원시적인 성격으로 파악했다. 당시 조선인들이 넓은 의미로서의 조상신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를 다양하게 발달해온 하나의 신앙 형태로 인정하지 않고, 원시적이며 미신이라는 관점을 가진 것은 분명 잘못됐다고 할 수 있다.


*무라야마가 조선을 인식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조선총독부 촉탁이라는 신분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경제 및 행정적 지원은 조선의 민속을 조사하기 위한 문헌 조사와 현지답사 등을 자유롭게 해줬다. 그러나 촉탁이란 신분은 동시에 조사 자료에서의 서술을 일정한 방향으로 제한시켰다.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이뤄진 조사와 보고는 애초 일제의 식민지 지배방침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키바 다카시나 아카마쓰 지조보다 상대적으로 총독부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무라야마의 경우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촉탁은 관리복무 규율에 따라 속박당하기는 하였으나 본관보다는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 조사 결과를 총독 이하 관리들 앞에서 발표했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촉탁에 의한 조사 결과가 식민정책에 반영되는 확률도 낮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조선의 유사종교' 뒤 무라야마는 중추원 신앙심사위원회에 참가했다. 1936년 총독부는 위원회 작업을 기초로 '심전개발(1930년대 세계공황의 여파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일본이 자국의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고 때마침 만연하던 사회주의 사상으로부터 조선인을 천황에게 순종하는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전개한 정신 계몽운동)' 기본골격을 완성했다. 하지만 무라야마의 이러한 조사들이 과연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로 실제적 효과를 발휘했는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미지수다.


참고 자료 : 박전열 외 지음·발행처 한누리미디어 '그 생성원리와 문화산업적 기능 일본의 요괴 문화(2005)', 김용의 지음·발행처 전남대학교출판부 '일본설화의 민속세계(2013)', 모로 미야 지음·김경아 번역·발행처 일빛 '전설일본(2010)', 천인호 지음·발행처 세종출판사 '풍수사상의 이해(1999)', 노자키 미츠히코 지음·발행처 동도원 '한국의 풍수사들(2000)', 이석정 박채양 최주대 지음·발행처 브레인북스 '조상을 잘 모셔야 자손이 번성한다(2007)', 손숙희 지음·발행처 국학자료원 '보통 사람이 쓴 무속이야기(1997)', 홍태한 지음·발행처 민속원 '우리 무당굿의 세계(2009)', 김희영 지음·발행처 민속원 '풍속 조사 자료를 통해 본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 인식(2014)', 무라야마 지준 지음·최순애 요시무라 미카 번역·발행처 신아출판사 '조선인의 생로병사 1920-1930년대(2014)', 무라야마 지준 지음·최석영 번역·발행처 민속원 '한국근대민속인류학대계 2: 조선의 풍수(2008)', 이와타 시게노리 지음·조규헌 번역·발행처 소화 '일본 장례문화의 탄생(2009)', 장윤선 지음·발행처 이숲 '조선의 선비 귀신과 통하다(2008)', 박태호 지음·발행처 서해문집 '장례의 역사(2006)', 유재철 지음·발행처 김영사 '대통령의 염장이(2022)', 김영민 지음·발행처 새문사 '우리 조상신앙 바로알기(2005)'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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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징병제 반발 없는 북유럽…징집대상 중 소수만 선발[뉴스in전쟁사]
수정 2024.03.18 13:54입력 2024.03.17 08:00

북구권 3개국, 연이어 양성징병
실제 징집대상 10~15%만 입대
인구 항상 부족…소수정예화 전략

[이미지출처=EPA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이어 인접한 유럽국가를 추가 침공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국경을 마주한 이웃국가들은 안보비상이 걸린 상황입니다. 특히 역사기간 동안 러시아와 자주 충돌했던 북유럽 국가들은 앞다퉈 여성징병제를 실시하며 국방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요.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이어 덴마크도 여성징병제 실시에 나서면서 유럽 많은 나라들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여성징병제는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는 많은 나라들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주제죠. 우리나라에서도 도입 문제를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하지만 실제 북유럽 국가들에서 운용 중인 여성징병제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청년 남성의 거의 대부분을 징집하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매우 다른 운용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인구가 늘 적었던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소수정예군 육성을 기본 전략으로 채택해왔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번 시간에는 이 북유럽 국가들의 여성징병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노르웨이·스웨덴 이어 덴마크도 여성징병제 나서
[이미지출처=AFP연합뉴스]

먼저 뉴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3일(현지시간) 메테 프리데릭센 덴마크 총리는 새로운 국방정비계획을 발표했는데요. 여성징병제 도입과 복무기간 연장 등을 골자로 한 국방 강화안이었습니다. 앞서 2015년 노르웨이, 2017년 스웨덴이 여성징병제를 시행한데 이어 덴마크 정부도 여성징병제 도입 준비를 발표하면서 국제적으로 화제가 됐는데요.


핀란드에 이어 스웨덴까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에 가입하며 발트해 일대가 새로운 분쟁지역으로 떠오르면서 북유럽 국가들의 안보 위기감이 잇따른 여성징병제 도입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죠.

사실 덴마크는 이미 전체 군인의 25% 정도가 여군인 상황이고, 여성들도 이전부터 군 복무를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어 대부분 국민들이나 정치권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거의 없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덴마크군은 현재 7000~9000명 수준의 직업군인을 포함해 2만명 안팎의 상비군을 두고 있었는데, 이번 국방강화안을 통해 이 숫자를 크게 늘릴 계획입니다. 오는 2028년까지 최대 6000명으로 구성되는 보병여단을 창설하고 지상 대공망도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죠.

실제 입대비율 징집대상의 10~15%…엄격한 선발과정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우리나라에서는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여성징병제가 북유럽에서는 별다른 정치적 마찰없이 도입되는 이유는 북유럽 국가들 특유의 군대조직 문화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징병제에 따라 성인 남녀가 모두 징집 대상은 되지만, 이중 철저히 선발된 소수의 인원들만 정예병력으로 키워지고 군인에 대한 대우도 매우 좋기 때문이죠.


AFP통신에 따르면 유럽에서 가장 먼저 여성징병제를 시행한 노르웨이는 2014년 '성 중립적 징병제'라는 용어로 병역법을 수정, 2015년부터 발효해 현재 여성징병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징병제에 따라 매년 19세가 되는 6만명 규모의 남성과 여성이 모두 복무 대상자는 되지만, 이중 10~15% 정도안 6000~8000여명 안팎만 선발돼 군 복무를 하고 있죠.


노르웨이는 2022년 기준으로 전체 1만7000여명의 병력 중 9800명이 징집된 의무복무 사병이며, 이중 34.5%가 여성입니다. 의무복무기간 19개월 중 1년은 병영생활을 하고, 나머지 7개월은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향토예비군으로 편입되는 구조를 갖고 있죠. 스웨덴의 여성징병제도 9~12개월 복무제도 등 세부적 사항을 제외하면 비슷한 구조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80% 이상이 여성징병제에 만족하고 있다는 여론조사가 나오기도 했죠.


이들 국가는 러시아의 안보위협 요소로 인해 징병법을 강화했다고는 해도 우리나라와는 안보상황이 다른만큼, 징집률에서 훨씬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셈입니다.

인구가 늘 적었던 북유럽, 소수정예군 육성 전략 지속
1709년 스웨덴과 러시아간 벌어졌던 폴타바 전투도.[이미지출처=러시아 박물관]

하지만 역사적 상황이나 안보 상황을 고려하면, 북유럽 국가들의 소수정예군 육성 전략은 모든 나라가 따라하기는 어려운 제도입니다. 장단점이 매우 뚜렷한 전략이기 때문인데요.


역사적으로 북유럽 국가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매우 적은 인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18세기 북유럽과 발트해 패권을 놓고 제정 러시아와 겨루던 스웨덴의 경우 당시 북구권 전체를 제패한 나라였지만, 인구는 200만명 남짓에 불과했죠. 이미 2000만명 가까운 인구를 가진 러시아와는 격차가 매우 컸습니다.


이로인해 스웨덴은 강력히 훈련된 소수 정예부대를 육성해 적군을 선제 타격하는 방식을 선호했는데요. 당시 칼(Karl) 12세의 왕이 이끌던 용맹한 병사인 '카롤리너'라 불리던 상비군은 북유럽에서 맹위를 떨쳤습니다. 하지만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에게 크게 패배한 이후 상당한 숫자의 병력을 잃게 되면서 스웨덴의 패권이 약해지게 됐죠. 이처럼 소수정예 병력 육성전략은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할 수 있지만, 단 한번의 패배에 치명타를 입는다는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후 스웨덴은 물론 북유럽 국가들은 19세기 이후 대외전쟁을 중지해 중립정책을 펴면서 2차대전 당시를 제외하면 대체로 상비군 숫자를 크게 늘리는 것보다는 소수 정예의 직업군인과 징집병, 예비군을 강화시키는데 주력해왔습니다. 이러한 안보환경이 갖춰진 상태에서 남녀 구분없이 우수한 인적자원을 선발해 징집할 수 있는 것이죠. 결국 제도적으로 우수한 부분들은 참고할 수 있지만, 현실적인 상황이 우리나라와는 정말 많이 다른 것입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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